<법구경(142) 마왕의 세 딸 이야기>
부처님께서 179번과 180번 게송을 처음 읊으신 것은
수행하시던 시절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였으며,
후에 꾸루 국을 여행하시던 어느 때
브라만 마간디야에게 게송 179번과 180번을 다시 읊어 주셨다.
브라만 마간디야는 자기 아내와 함께 꾸루 국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마간디야'라고 부르는 아주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마간디야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처녀였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처녀의 부모는 청혼을 매정하게 거절하면서
"당신은 내 딸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소."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의 부처님 처소에서 세상을 두루 살펴보시다가
마간디야와 그의 아내가 아나함 과를 성취할 시기가 되었음을 아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가사를 입으신 다음
발우를 드시고 브라만 마간디야의 집으로 향하셨다.
브라만 마간디야는 불을 숭배하는 신자여서
매일같이 제단의 불앞에 나아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날도 마간디야가 제단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가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아! 저 사문은 풍채가 장대하고 용모도 참으로 빼어났구나.
게다가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 훌륭하기 이를 데 없다.
저런 남자라면 내 딸과 결혼시킬 만하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곧장 부처님께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딸이 있소.
나는 내 딸과 어울리는 남자가
이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이라면 잘 어울릴 것 같구려.
내가 내 딸을 이리로 데려와 당신의 아내로 삼게 해 줄 테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가 곧 아내와 딸을 이리로 데려 오리다."
이렇게 말한 그는 부처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쏜살같이 그곳을 떠나 자기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는 지금 우리 딸을 시집보낼 만한 사람을 만나
잠시 기다리라고 일러두고 왔소.
그러니 어서 딸에게 고운 옷을 입히고 잘 치장해서 데리고 갑시다."
그들은 부지런히 딸을 치장시켜 정해 둔 곳으로 갔다.
한편, 부처님께서는
브라만 마간디야의 수다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하다고 대답을 않으시고,
계시던 장소에 발자취만 남겨 놓으신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잠자코 서 계시었다.
얼마 뒤에 마간디야와 그의 아내는 그곳에 도착해서
부처님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부처님의 발자취를 보았다.
그러자 브라만 마간디야는
"자, 여기 이 발자취를 보시오.
이것은 그 사람이 남겨 놓은 것이 분명하오."
하면서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마간디야의 아내는 상당히 유식한 사람이어서,
베다에 나오는 발자취를 보고 인간의 유형을 판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보더니 남편에게 면박을 주었다.
"여보! 이 발자취의 주인은 우리 딸 같은 것을 상대할 분이 아니에요.
이 분은 다섯 가지 욕망을 모두 떠난 사람이에요.
당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어요."
그러자 브라흐민은 지지 않고
"당신은 아직도 한 방울 물속에 악어가 들어 있다고
허풍을 떠는 그 습관을 고치지 못했소?"
하며 아내를 타박했다.
그는 마침내 저만큼 서 계시는 부처님을 발견하고
부처님께 다가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아달라고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청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던 때
마라 왕의 세 딸이 유혹해 온 일만을 말씀해 주시었다.
마라의 세 딸들이란 요염하고 아름다운 따나, 아라띠, 라가로
이들은 각각 갈망과 집착, 성냄과 악심 그리고 욕망을 상징한다.
그녀들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재주가 능란하여
어떤 대장부도 넘어가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마라도 천하를 지배하는 사내들을 지배하는 것이
자기네들이라고 생각하여 딸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런 대단한 마왕의 딸들이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었던 것이다.
"갈망과 집착과 여러 가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것에도 유혹을 느끼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유혹하려 하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그녀들의 유혹을 이겨 내신 체험을
그 브라흐민 가족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나서
다음 게송 두 편을 다시 읊으셨다.
그의 정복에 다시 패배란 없는 것
이 세상의 번뇌를 정복하지 못한 자
누구도 붓다를 따를 수 없다.
붓다는 무한하며 자취가 없는데
너는 붓다를 어떤 길로 *인도하겠다는 것이냐?
*그의 정복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앞두고 마라의 딸들의 유혹을 이기신 일. 욕망과 번뇌에 대한 승리.
* 인도하겠다 : 부처님을 다시 생사윤회가 따르는 욕망의 세계로 인도하려 해도 소용없다는 뜻.
붓다는 일체에 집착 없는 이,
어떤 집착과 욕망도 그를 다시 이끌어 낼 수 없다.
붓다는 무한하며 자취 없는데
너는 그를 어떤 길로 인도하겠다는 것이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읊으신 다음
계속하여 브라만 마간디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간디야여,
여래는 아름다움에 있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마라의 세 딸을 보고도 감각적 쾌락을 일으키지 않았느니라.
하물며 네 딸이야 오죽 하겠느냐?
네가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는 네 딸이란 알고 보면
가죽주머니 속에 더러운 오줌과 똥을 가득 채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 더러운 몸을 여래는 발바닥에도 닿지 않게 하겠거늘
하물며 그를 욕망의 대상으로 취하려 할 리가 있겠느냐?"
부처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듣고
브라흐민 마간디야와 그의 아내는 곧 아나함 과를 성취하였다.
그들은 곧 자기 딸을 아우에게 맡기고
가정을 떠나 비구와 비구니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아라한의 경지까지 올랐다.
한편 브라만의 딸 마간디야는
부처님의 말씀에 심한 모욕감을 느껴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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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애와 집착
사랑하고 예쁜 딸을 최고의 남편감에게
시집보내고 싶은 것이 아버지 마간디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적정한 선을 지키면 문제가 없겠지만,
좋은 남편감은 보이지 않고
왠만한 용모, 학력, 능력의 남자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사문인 부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아버지가 보기에는 최고의 남편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출가한 부처님을 환속시켜서라도
이 멋진 사윗감에게 사랑스런 자기 딸을 시집보내고 싶어
앞뒤 안가리고 난리를 피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눈이 먼 아버지에게
부처님은 바로 당신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십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실 때
마왕의 세 딸의 유혹에도 초연하셨다는 것.
일체의 모든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신 붓다라는 것.
이 가르침이 사랑하는 딸에 눈멀어 있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비록 딸에게 눈멀어 있던 딸바보였지만,
그 아버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지성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부정관에 대한 방편의 가르침을 받고
자기 딸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처님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식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무엇인가에 붙잡히고 집착하는데서 오는
갈애와 집착의 괴로움과 그 폐해를 자각하고
갈애와 집착을 여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2. 세속적 행복
그 동안 아버지의 행복은
자식에 집착하고 가족에 집착하고
재물을 얻으려는 무언가에 집착함에서 오는
세속적 행복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애착과 집착에서 오는
세속적 행복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쁜 자식이 건강하게 커나갈 때의 행복,
여윳돈이 있어 새로운 가전 제품이 들어올 때의 행복 등등...
이러한 행복이 애착과 집착에서 오는 세속적 행복일 것입니다.
이러한 애착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무관심하고 차갑다면 어떨까요?
자식에 대한 사랑 없이
차갑고 무관심하게 살아간다면
자식과의 관계 속에서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마간디야가 부처님께 원한을 품 듯
자식은 자신에게 냉랭한 부모에게 거부감을 갖거나
애정 결핍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속적 행복의 이면에 있는
'무상함'의 불법의 진리에도 눈뜨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커서 속을 썩이거나,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가 속을 썩이거나,
건강한 몸은 병들고,
부유한 살림살이가 기울 수 있슴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집착하는 즐거움,
세속적 행복에만 빠지거나 붙잡혀 있으면
근심 걱정이 생기고 괴로움에서 벗어날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상함'의 진리를 깨닫고
자식이든 재물이든 붙잡히지 않는
집착을 여의는 수행을 통해
집착을 여의는 출세간의 행복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3. 출세간의 행복
초기 불교에서 많은 수행자들이
출가의 길을 택했던 것은
세속을 멀리하고 떠남을 통해
출세간의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멀리함과 떠남은
아주 차갑거나 비열한 것이 아니라
쿨한 것입니다.
반면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세속을 멀리하고 떠남을 통한 길은 아닙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되
세속에 물들지 않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되
평온하고 자비로운 바른 관계를 맺으며
세속적 행복과 출세간의 행복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길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부처님은 무상함의 진리를 통찰함으로써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집착을 여읜 깨달음의 경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무집착의 법문은
관계성에 대한 부정이나,
차갑고 몰인정하고 비열한
무관심을 추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아버지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딸은 모욕감을 느끼고 부처님께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딸 마간디야는 나중에 코삼비 국왕의 제2 왕비가 되어
부처님께 귀의한 사마왓띠 왕비에게 극악한 악행을 저지르고
나중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다.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도
서로 상반된 업의 인과응보가 생기는 것을 보면서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에 잘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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