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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1.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1) - 조선 억불 정책의 배경

by 아미타온 2025. 8. 24.

1.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1) - 조선 억불 정책의 배경 

 

<공주 마곡사>

 

조선 왕조를 개국한 주체는 유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였습니다.

신진사대부는 주자의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고 억불 정책을 펴 나갔습니다.

 

과연 이들은 왜 불교를 탄압했을까요?

 

고려 말기 불교가 어떠한 모습을 보였기에

삼국 시대 이래 1,000년을 이어 내려온 불교가

국교로서의 전통과 권위를 잃어 버리고

조선 왕조 시대 억불로 신음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공주 마곡사 대적광전>

                                                

 (1) 사원전의 비대화와 승려들의 부패

 

농경 사회에서 땅은 모든 재산의 원천입니다.

고려 말기 사찰(절)은 "사원전(寺院田)"이라는 명목하에 많은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사원전은 국왕이나 귀족 그리고 일반 신도들이

기부하고 보시한 토지인 "시납전(施納田)"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떼어주어 국가 대신

조세를 받아들이는 권리를 준 토지인 "수조전(收租田)"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스님들이 스스로 개간하거나 재산을 모아 매입한 토지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고려 말기 전체 토지가 약 62만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사원이 소유한 사원전이 무려 10만결로 

전체 토지의 약 6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사원전에는 면세의 특혜가 있었습니다.

절의 재산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반 장정들은 보수 없이 국가의 노역에 동원되는 부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스님은 이것이 면제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찰의 특권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부정과 탈법이 나타났습니다.

 

농민들 중 많은 수가 절에 토지의 명의를 기탁하고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과 '노역'의 면제라는 2가지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런 농민드를 절에 소속된 승도라는 의미에서 "수원승도(隨院僧徒)"라고 불렀습니다. 

일종의 비승비속의 위장승려인 셈이었습니다.

 

고려 말에는 이들 위장승려인 수원승도를 포함하여

승려의 수가 장정 전체의 3분의 1쯤 되었다고 한다.

 

국가토지의 1/6이 비과세 토지이고,

전체 남자의 1/3 정도가 승려로 노역 면제가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사원전과 승려의 숫자가 늘면 늘수록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많아져 국가의 재정을 압박해갔습니다.

 

이와 같은 사원 경제는 귀족들까지 뛰어든

이권 창고이자 재산 은닉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수원승도와 노비들을 거느린 큰 사찰과 권승들은 부패해 갔고,

수행을 목적으로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부역 면제를 위해 출가한 많은 승려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계율을 어기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많아 사회 문제화되었습니다.

 

고려 말기 대규모 사원전과 노비를 소유한 불교의 부패는 심각했고.

신진사대부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입장에서 부패한 불교는 개혁의 1차 대상이 되었습니다.  

 

                                               

(2)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난 지나친 기복불교

 

고려 후기 몽고의 침입 이후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된 상황에서

고려 불교는 더욱 타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왕실에서는 나라의 안녕을 위한 큰 제사와 불사를 벌였으며,

귀족들과 민중들에게 기복 신앙과 공덕 신앙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모두 부처님에게 비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왜곡된 신앙의 형태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장황한 제사와 불사를 벌여

부처의 힘으로 요괴를 진압한다는 제사를 벌였습니다.

 

민간에서는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빌어

오래 살고 재화가 늘기를 바라는 기복 신앙이 성행하였습니다.

 

자리가 나쁜 곳에 절과 탑을 세워 악한 기운을 소멸한다는 풍수를 보거나

절에서 사람들에 대해 관상을 보아 길흉화복을 보아 주는 것도 빈번했습니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일으킨

수선 결사와 같이 수행을 통한 청정한 승가상의 구현이나

고통받고 힘들어 하는 민중들을 위해 불교계가 일하는 모습은 드물었습니다.

 

사회적 불안 심리를 선도하여

민중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보다는

이에 편성하는 미신적 모습을 보여 주었고,

청정한 수행이라는 불교의 정신적 기본 흐름과

보살행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교적 모습에 어느 신진사대부는

다음과 같이 비판의 칼을 들이대었습니다.

 

"농민은 농사에 힘쓰고

상인은 상인대로

관리는 관리대로

자기의 맡은 바 직업에 충실하고 있다.

 

그런데 중들은 농사와 길쌈도 하지 않고

또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없다. ...

 

그뿐인가.

지금은 화려한 전당에서 왕들처럼 좋은 음식을 먹고

광대한 농장과 수많은 노비를 거느려

문서 장부가 어느 관청보다 더 높이 쌓여 있다.

 

또, 한차례 불사(佛事)에 평민 10집의 재산을 허비한다.

실로 인류의 적일 뿐 아니라 천지의 거대한 좀이다."

 

<안동 병산서원>

 

(3) 성리학의 도전과 불교비판에 대한 대응 부재

 

한편, 중국 남송 시대 주자가 일으킨 성리학이

고려에 들어와 많은 유생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리학은 우주 자연의 원리와 인간 사회의 질서를

"이기론(理氣論)"으로 설명했습니다.

 

우주와 만물은 초자연적인 형이상학적의 '이(理)'와

현실의 질서를 지닌 형이하학적인 '기(氣)'가 결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理) 는 완전한 선이고,

기(氣) 는 선악이 뒤섞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하늘의 이(理)를 받아 선천적인 성(性)을 갖고

후천적인 기(氣)를 받아 형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본래의 성품(性)은 선하지만,

기(氣)를 받아 선악이 뒤섞여 나타나므로

인간은 수양을 통해서 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性)과 이(理)를 중시하여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용어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이와 기의 차별은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이, 신하는 기,

지배하는 자는 이, 지배받는 자는 기,

상전은 이, 노비는 기라는 논리의 성립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차별적인 논리에 따라 

명분과 질서와 윤리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시대 유교 사회에서

군신, 부자, 부부간의 삼강오륜처럼

상하와 귀천의 차등을 인정하고

각자가 주어진 직분과 예의를 다하며 

충실하며 살아야 한다는 윤리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초기 성리학자들이 불교의 타락과 승려의 부패를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과는 달리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후기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적 논거를 가지고 대담하게도

불교 교리 자체를 비판하고 강력한 불교 타파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 타도의 선봉장에 선 사람이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지은 정도전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사람은 기가 모여 태어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여

불교의 윤회설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설파하였습니다.

 

또한, 사람의 운명은

후천적 기질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불교의 기복 신앙에 대해 강도 깊게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려의 출가와 불교의 평등한 가치관에

승려들의 불충, 불효를 강조하며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정도전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상적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4) 조선 왕조의 지배체제 강화를 위한 억불 정책

 

역성 쿠테타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조선 왕조는

고려의 잔재를 치울 새로운 정치 질서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들에게

고려 = 불교 = 귀족세력(권문세가) 은 동일 선상의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 유교 = 신진사대부 라는

새로운 지배 체제와 새로운 통치 이념을 전파시켜야 했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국가 체제의 물적 기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불교 세력의 힘을 약화시켜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면에서 불교에 대한 정리 작업은

새로운 왕조의 기반 강화에 가장 좋은 방책이었습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 내에서 척불 정책을 취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을 왕사로 모시는 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도첩제(국가가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인 동시에 군역의 면제증)를

강화하여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이 왕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이고 강력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종은 결국 숭유억불의 방침을 시종 견지하여

정책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부역의 부담자인 장정의 확보와 조세의 보충이라는

인적 물적 국가 재원의 확보를 위해

도징과 설연의 비행(사노간의 간음 사건)을 기회로

불교 사찰의 정리에 손을 대었습니다.

 

태종은 사원의 재산을 동결시키고

사원전(寺院田)을 몰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남겨둘 공인 사찰로 242사(寺)를 정하였고

여기에 상주할 승려의 정원수도 책정하여

그 정원수에 따라 토지와 노비가 책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지배층은 조세원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환속당한 승려와 사원 노비는 양인이 되어

부역과 조세를 부담하며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데 한 몫을 하였습니다.

 

결국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이 남게 되었고

왕사, 국사 제도도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전의 11개의 불교 종단을 7개로 축소시켰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력한 억불 정책이 강행되었습니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되었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 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되어 선. 교 양종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 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승려들을 노역을 부담하게 했고,

그 이후로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 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세조 때에 잠시 호불 정책을 폈지만,

성종 때부터 중종 때까지 억불 정책은 극에 달했습니다.

 

성종은 불교에 호의적이던 훈구파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교 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하는 것은  

장정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군역제도의 문란으로 군역을 기피하려는

수단으로 승려가 된 양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신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습니다.

 

급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를 폐지시켜 

합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성종은 출가를  완전히 금했고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이 텅텅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위축되어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법이나 제사법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마찬가지로 억불 정책을 폈습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 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했으며 승과를 폐지하였습니다.

 

그는 사찰을 기방으로 사용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승려들을 사냥몰이꾼으로 삼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다달았습니다.

 

중종은 지난날의 사화로 물러났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였고 불교는 더욱 억압 받게 되었습니다.

 

중종은 승과를 합법적으로 폐지시켜

선.교 양종의 종단 자체까지 그 존재가 무의미해졌고

한국 불교는 선명치 않은 무종파의 혼합적 양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상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불교가

강하게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교 내외적 문제에 적절한 대응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승려와 사찰의 타락,

왜곡된 기복 신앙 성행이라는 불교 내적인 문제와,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불교 비판에 대한 대응 실패,

신왕조를 개창한 조선 왕조의 불교탄압이라는 불교 외적인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만한 불교 내부 역량의 미흡함이 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