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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1.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5) - 조선 여인들의 불교 신앙

by 아미타온 2025. 9. 19.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5) - 조선 여인들의 불교 신앙>

 

<북한산 고양 흥국사>

 

조선 시대를 '숭유 억불의 시대'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불교 관련 기사를 보면

당시 불교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교에 대한 억압과 핍박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 각종 사지와 문집,

고문서에 나타나는 불심의 흔적들은

조선 시대의 불교가 고려나 신라에 비해

훨씬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들어

불교의 명맥이 유지되었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서 조선 후기를 거치며

한글 경전이나 진언집, 다라니경의 인쇄는 훨씬 더 증가했으며,

사찰의 중수나 괘불, 개금불사, 불상의 조성 등도

열악한 시대 환경을 감안하면 빈번하였슴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불교를 지탱시킨 요인으로

보수적인 유교의 한계나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간 불교계의 노력,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활약 등을 들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 여성 불자들의 신앙심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왕실의 여인들은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기득권을 박탈당한 불교계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호하는 최고의 방호벽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 왕실 여인들의 불교 신앙과 불사의 대표적 사례들을 통해

조선 시대 여인들의 불교 신앙의 저변과 함께 

왜 그녀들이 불교에 의지하려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양 흥국사 약사전>

 

(1) 선조비 의인 왕후를 통해 본 불교 신앙의 형태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배다른 동생인 영창 대군을 뜨거운 방에서 태워 죽이는 폐륜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결집시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중립외교를 통해 명과 청 사이의 중립 외교로 성공한 광해군은

정치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조선 왕들 중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궁에게서 배출된 왕자, 즉 서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영창대군은 비록 후실이나마 정실 왕비의 아들이었습니다.

 

종법 질서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조선 시대에는

태생이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동생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신분적 콤플렉스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무리수를 두게 했고,

이는 결국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부메랑으로 다시 작용하게 됩니다.

 

그 비극의 발단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 왕후

박씨에게 후사가 없었던 데서 비롯됩니다.

 

수려한 외모에 후덕한 인품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몸이었습니다.

 

선조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을 시기하지 않고,

어린 시절 어머니(공빈 김씨)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돌보며,

항상 불경을 가까이 하는 그녀를 궁중 여인들은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고양 흥국사 약사여래불>

 

공빈 김씨, 인빈 김씨 등 선조의 후궁들이

왕자들을 연달아 생산하는 구중궁궐 속에서

단 한명의 후사도 배출하지 못한 채 국모 자리를 지켜야했던

그녀의 마음은 매우 힘들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그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불교에 매달리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전국 명산대찰에 의인 왕후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는 불사에 열심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유명한 사찰에

자신을 위한 불단을 마련하고 아들을 생산하기를 빌었습니다.

 

고성 건봉사, 보은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그녀가 보시한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의인왕후의 경우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불교 신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기 위한 발원과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위로,

그리고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은

‘불심’이라는 이름으로 왕실의 비빈 상궁들을 비롯한

조선 시대 여인들에게 폭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여주 신륵사와 남한강>

 

(2) 왕실 여인들을 통해본 조선조 여인들의 불교 저변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 중 몇 퍼센트가 불교신자였을까요?

 

정확하게 수치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 왕후 신씨로부터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씨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왕비들이 사찰에 기도처를 마련하거나 불사에 동참했습니

 

전체 구성원의 80~90%가 하나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종교에 대한 기호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에 가깝습니다.

 

즉, 왕실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왕비로부터 말단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여인들이

수백 년간 지속해온 ‘공통의 문화’였습니다.

 

이것은 양반층이나 일반 민중들의 여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국가의 억불 정책과는 별도로

왕실의 상제례는 불교식으로 치러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종ㆍ명종 대를 기점으로

성리학에 근거한 주자가례가 정립되면서

모든 의식이 유교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들의 추모 시설은

능침사(능에 절을 지어 왕을 추모하기 위한 절) 대신 종묘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내세를 논하지 않는 유교는

왕실 여인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기에 종교적 성격이 너무 미약했습니다.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희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최고의 종교는 불교였습니다.

 

<여주 신륵사 3층석탑>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이래 1000여 년간

사찰에 불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하는 데 익숙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불교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기복의 종교였습니다.

 

조선 시대 왕실 여인들의 불교 신앙은

몇몇 특정 인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됩ㄴ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최초의 왕비로

경복궁에 입궐한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는

결혼 전부터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부터 불교에 귀의하도록 설득하고,

무학 대사를 왕사로 봉하게 한 것도 신덕왕후의 조언에 의해서였습니다.

 

태조가 신진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궐 내에 내불당을 건립한 것도 신덕왕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와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 또한 불교신자였으며,

세조의 부인 정희 왕후는 조선시대 사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화주 중 한 명입니다.

 

정희 왕후는 세조의 병이 깊어지자

남편의 쾌유를 빌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중창하고,

여주에 있는 세종 대왕의 릉인 영릉을 이전하면서 남한강변에 신륵사를 중수하였습니다.

 

또 세조가 죽은 후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인근에 위치한 봉선사를

89칸 규모로 중창하여 광릉의 능침사로 삼았습니다.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남편 세조,

그리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두 아들 덕종과 예종을 먼저 보낸 정희 왕후로서는

아픈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는 위안처가 불교 이외에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녀는 평생 동안 전국 각지의 사찰에

대시주자로 참여하면서 여러 사지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여주 신륵사 나옹화상 부도탑>

 

정희왕후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 또한 독실한 불자였습니다.

 

인수대비는 왕실여인들을 위한 지침서로

유교적 여성관을 담은 "내훈"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유교적 소양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왕실의 어른으로서 유교를 내세웠던 반면

자신이 위안을 구한 곳은 불교였습니다.

 

인수대비는 불교 경전을 산스크리트어, 한문, 언문으로

각각 번역한 불서를 남길 정도로 불교에 심취하였습니다.

 

인수대비는 남편과 아들의 복락을 위해 간경도감을 통해

불경 간행에 적극 나섰으며, 직접 금강경 등을 필사하기도 했습니다.

 

1471년 간경도감이 폐쇄되자

그 이듬해부터는 직접 흩어진 불경 목판을 수집해 인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간된 불경이 총29편 2,805권에 달합니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

선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

이어 등장하는 왕비들 또한 사찰 중수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여주 신륵사 모전석탑>

 

이러한 불교신앙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팔공산 파계사에서 불공을 드리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건봉사에 석가상을 조성하고 팔상전을 지어준 영조의 비 정성왕후,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

순조를 낳고 수락산 내원암에 칠성각을 조성한 수빈 박씨,

봉은사 괘불을 조성한 순조의 후궁 순화궁 김씨,

금산 보석사를 중창해 원당으로 삼은 고종비 명성황후,

무량사 산신각을 조성한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

조선왕조가 망한 후 낙선재에서 살다 말년에 ‘대지월’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한 조선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

이르기까지 왕실여인들의 불교신앙은 꾸준히 이어졌던 것입니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3) 사찰기록에 등장하는 조선 왕실 여인들의 대표적인 시주 내역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서는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습니다.

 

이 복장 유물 가운데는 15세기말 학조 대사가 쓴

‘해인사중수기’가 후령통 내부에 포함돼 있었는데,

여기에는 성종 21년(1490) 해인사에서 중창 불사가

진행된 과정과 시주자들의 명단이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해인사 중수 및 대장경 판당(板堂)의 보수가 왕실의 여인들,

즉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인혜대비를 비롯한

수많은 상궁,궁녀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204명으로 이루어진 명단의 대부분이

왕실의 비빈들로 구성돼 있으며,

그 중에는 귀인 권씨, 소의 이씨 등 첩지를 받은 여인뿐만 아니라

상궁과 일반 궁녀들까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또한 현숙 공주, 혜숙 옹주, 제안대군 부인,

영응대군 부인 송씨 등 왕실의 친인척들도 다수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세조의 사위 정현조, 계성군, 안양군, 봉안군 등의

일부 남자 왕친들도 시주에 참여했습니다.

 

이처럼 왕실 여인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남자들까지도 불사에 동참한 사실은

왕비와 비빈들의 불교신앙이 그들의 남편, 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합니다.

 

<해인사 홍류동 계곡>

 

한편, 조선 왕실의 여인들이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사찰들은

주로 명산대찰이나 수도권 인근의 사찰들이 많았습니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등 명산에 위치한 사찰이

‘기도의 효력이 큰 사찰’로 선호되었고,

또한 왕실 능침사찰로 수도권 근처의 왕릉 근처에 위치한

사찰이 지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금강산의 건봉사, 유점사, 표훈사, 신계사 등

여러 사찰들은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되어 왕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비빈들이 왕자 생산을 기원하는 불공도량으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봉사는 세조, 예종, 효종, 영조 등

역대왕의 위패가 대대로 모셔질 정도로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표적인 왕실원찰입니다.

 

<해인사 대적광전 부처님>

 

현재 남아있는 건봉사 사지에 남아있는 기록 중에서

왕실 관련 시주 내용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조 35년 의인왕후가 복호(復戶) 5결을 하사하다
숙종 9년 명성왕후가 불장(佛帳)과 초의(卓衣)를 하사하고

    천금(千金)을 하사하여 불상을 개금하다.
경종 4년 주지 채보가 9층탑을 건조(建造)하여

   부처의 치아를 봉안하니 명성왕후가 천금(千金)을 하사하다.
영조 30년 정성왕후가 상궁 이씨, 안씨를 보내 석가상을 조성케 하고

    팔상전을 건립하여 원당으로 삼다.
영조 52년 정순왕후가 국재(國齋)를 설하고

    별시(別提) 이인배(李仁培)를 보내 재(齋)를 감하다.
순조 5년 왕비 김씨가 국재를 설하고

   금자대병(金字大屛)과 화엄경 1부를 하사하다.
순조 18년 귀빈임씨가 정롱일산기(籠日傘旗) 등을 희사하다
순조 20년 효의왕후가 평상을 하사하여 어각에 안치하다
헌종 14년 무신 순원왕후가 금품과 즙물(汁物)을 하사하여

    본사 승려 동화(東化)로 기도를 행하다.
고종 16년 기묘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병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다.

    왕실과 각궁과 각재보로부터 불구와 금품을 다수 희사하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불화>

 

<건봉사지>에 나타난 왕실 여인들의 불사 내용은

토지와 의복, 금, 경전, 즙물, 불구, 돈 등 매우 다양합니다.

 

또한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대를 건너뛰지 않고

왕실의 꾸준한 지원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의 시주 내역을

가장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불화 하단에 기록된 화기(畵記)입니다.

 

일반적으로 불사 시주자들의 이름은 후대로 지나면

문서가 소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불화나 괘불의 조성에 참여했을 경우에는

그 작품이 전해지는 한 화기 속에 포함돼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대부분의 조선후기 불화에는 하단에 화기가 남아있어

시주자들의 상세한 내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믿었던 신도들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서도 불교에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왕실의 여인들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95년에 발간된 조선 불화 화기집에는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는 수많은 상궁들이 명단이 올라있습니다.

 

<해인사 불화>

 

예를들어, 현등사 칠성도, 보문사 신중도, 보문사 중단도,

견성암 시왕도 등에는 상궁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또한, 서울 봉은사 괘불은 1886년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 김씨를 비롯한 여러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조성된 작품입니다.

 

봉은사에는 이 밖에도 판전 비로자나불, 대웅전 삼세불화, 영산회상도 등에

상궁들이 시주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화들의 예술작품의 상당수는

왕실 여인들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조성될 수 있었습니다.

 

불화에 등장하는 왕실 여인들의 이름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신앙이 대비,

왕비부터 이름 없는 나인이나 상궁들에게까지 폭넓게 퍼져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이들의 경제력이 조선시대 불교를 지탱시킨 커다란 경제원으로 기능했다는 점입니다.

 

<양평 용문사 일주문>

 

(4) 왕실 여인들의 불교에 대한 정치적 외호 역할

 

왕실 여인들의 불교신앙은

국왕이나 왕자, 공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와 부인이 독실한 불교신앙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태종이나 세종, 세조, 성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들이 불경을 즐겨 읽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이들이 어머니나 부인에게서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은 사찰의 시주자로서

불교의 경제적 지지세력이 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압력을 가했습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맡게 되자 조정의 대신들은

세조-정희왕후로 이어진 호불정책을 거두고,

유교적 정치질서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양평 용문사 대웅전>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도첩제의 폐지였습니다.

 

승려가 되는 제도 자체를 법으로 원천 금지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성종은 도첩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인수대비는

아들에게 직접 언문교지를 내려

억불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하였습니다.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불교는 선왕의 유제(遺制)로 대전에 실려 있다.
② 역대 제왕이 불교를 배척하고 싶어도 끊지 못한 것은

    인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서이다.
③ 군정이 부족하다고 하여 승려되는 것을 금지한다면

    이는 오랑캐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④ 중국은 집마다 불당이 있어 불교 숭상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데도 오히려 오랑캐를 잘 막고 있다.
⑤ 승려에 대한 탄압으로 그들이 굶어죽게 된다면

    이는 화기(和氣)를 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⑥ 승려가 산중에 살기 때문에 도적을 예방할 수 있다.

 

성종은 어머니의 요구를 묵살하자니

유교의 최고덕목인 효를 저버리게 되고,

그렇다고 신하들이 지켜보는 마당에

다시 도첩제를 인정하자니 성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결국 인수대비의 반대로 인해 도첩제 폐지 문제는 흐지부지 흘러갔고,

이후 조정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고 막지도 않아

도첩제는 유야무야한 제도가 돼버렸습니다.

 

성종의 비 정현왕후 윤씨 또한 독실한 불교도였습니다.

그녀는 성종이 죽자 그의 왕패를 봉은사에 안치하였습니다.

 

연산군 7년 신하들이 왕에게 그 진위를 묻고 따져들었을 때

연산군은 이 조치가 정현왕후 윤씨의 명이지

자기의 의사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합니다.

 

정현왕후는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연산군에 의해 폐지된

선교양종의 복구를 요청하지만 유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양평 용문사 관음전>

 

결국 선교 양종을 다시 복구한 것은

명종의 섭정이 된 문정왕후에 의해서였습니다.

 

명종을 왕위에 앉힌 후

20여 년간 국정을 좌지우지한 문정왕후는

조선전기 최대의 호불 왕비로 평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유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당한 왕비이기도 하였습니다.

 

문정왕후는 섭정의 자리에 오른 후

당시 불교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보우를 국사로 임명하고

명종 7년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으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정하는 한편 승과를 부활시켰습니다.

 

도첩제가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승려가 되는 길을 어렵게 만든 제도라면,

승과는 과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승려가 되고

승려시험에 등위를 매겨 국가에서 지위를 인정해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성종 대에 도첩제까지 없애고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으려 했던 상황에서

문정왕후가 승과를 부활시켰으니 유신들의 반대는 컸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끊임없이 상소를 올리며

승과를 폐지하라고 주청했으나 윤씨는 그때마다 이를 묵살했습니다.

 

<용문사 관세음보살님>

 

그녀의 불교계에 대한 옹호는

조응규라는 유생이 도오라는 승려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관을 보내 승려인 도오가 맞은만큼 유생인 조응규를 때리라고 명할 정도였습니다.

 

여자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게다가 적극적인 호불정책을 폈으니,

이러한 문정왕후에 대한 당대 유학자들의 평가는 상당히 폄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저자거리에는 보우와 문정왕후가

연인사이라는 소문까지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습니다.

 

문정왕후 이후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불교에 대한 옹호정책을 실시한 왕비는 사실 없습니다.

 

이후 유교적 질서가 자리 잡고,

또 사림들의 세력이 공고해지면서

더 이상 여인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왕실의 여인들이 불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교계는 엄청난 정치적 지지세력을 확보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들의 불교신앙은 양란 이후 전화에 소실된 사찰들의

중창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되었고,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은 왕실의 원당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정부의 가혹한 납세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유신들은 승려라는

계층에 대한 허용 자체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조직하여

왜적을 무찌른 승려들에 대한 공로를 참작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승군이라는 조직이 국가의 납역 제도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즉,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군사시설을 확충하고

다리, 궁궐 등의 대공사를 하는데 승군들이 주요 노동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승려들이 국가의 주요 납역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사찰에는 군역을 비롯해 각종 특산물을 공급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왕실 여인들이었습니다.

 

왕실 비빈들은 왕에게 요청하거나

혹은 직접 해당 관청에 교지를 내리는 방법으로

왕실 관련 사찰들에 내려진 과중한 납세의 시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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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오늘날 전해지는 불교의 유산은 많은 부분

조선시대 여성들의 불심에 의해 이뤄지고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왕실, 양반층의 여인들과 함께

절에 갈 때 쌀 한바가지라도 가져가서 보시하며

복을 빌었던 조선조 여인들의 불심에 의해 한국 불교가 유지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여성들의 불심이 만들어낸 나룻배를 통해

불교는 오늘날로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불교는 조선조 여성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선조 여인들이 불교를 신앙한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간혹 인수대비처럼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사경할 수준 정도의 똑똑한 여성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비빈이나 궁중 나인들,

그리고 양반가와 일반 서민들의 여인들은   

가족의 안녕과 부귀를 위해,

현세의 고통을 벗어난 내세의 평안을 위해 

불사에 참여하고 부처님 앞에 열심히 복을 비는

기복적인 형태의 신앙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조선조 여인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비애를 불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는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로서

여성이 살아가기에는 힘든 사회였습니다.

 

이들의 정신적 탈출구가 바로 불교였으며,

유교에서 충족되지 않는 내세에 대한 갈망과

현세에서의 복락을 발원할 수 있는 의지처 또한 불교였던 것입니다.

 

<화성 용주사 관음전>

 

저도 어렸을 때 할아버지, 아버지는 절에 다니지 않았지만,

할머니 혼자서 집안에 있는 캐비넷 안에 조그만 석불을 놓고

"관세음보살"을 외면서 자주 기도를 드렸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들을 기복불교를 했다고

무조건 폄하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국 불교의 치마 불교적 전통과 신앙 형태가 

오늘날까지 큰 차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해마다 입시철만 되면 큰 사찰, 작은 사찰 할 것 없이

대학입시 합격을 비는 보살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사찰들은 앞다퉈 ‘대학입시 합격 발원 100일 기도’니

‘철야정진기도’니 하면서

불자들이 마음놓고 복을 빌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제공합니다.

 

절을 찾는 동기가

기복을 위해서든,

삶의 고통 때문이든,

이것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복을 위해서 절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개인적 기복에만 머물지 말고

기복을 넘어선 해탈을 위한 수행과 공부로

바르게 인도해주는 사찰과 스님들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도 종교가 계속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종교 신앙인의 분포가 여성층에만 편중되어 있다거나,

특정 연령대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 종교의 신앙 형태가 균형감을 가지지 못하고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불교의 과거가 여성들의 기복 신앙으로 유지되었다고 한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남성들과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균형감을 갖춘 불교가 되도록 신앙 형태, 학습 방법, 사찰 운영 등에 있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