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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1. 조선후기 불교의 모습(2) / 억불정책 속의 힘겨운 삶

by 아미타온 2025. 9. 2.

1. 조선후기 불교의 모습(2) / 억불정책 속의 힘겨운 삶

 

(1) 무종산승(無宗山僧)의 시대 

 

<경주 불국사>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억불 정책을 단행하였습니다.


태종 때부터 불교 종단에 대한 강제적인

통폐합 작업을 진행하여 불교 교단을 약화시켰습니다.


사찰에 대한 정리 작업도 이루어져 사찰의 수는 격감하였고,

도성 안의 사찰은 산 속으로 쫓겨났습니다.


또한, 사찰이 가지고 있던 사찰 소유의 토지를 국고로 환수하고,

사찰 노비를 환속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에 가졌던 불교의 국교로서의

특권과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습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출가하는 것을 제한하고

승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도첩제를 엄격하게 실시했습니다.

 

도첩제는 출가 승려에게 정부에서 신분증(도첩)을 발급하는 제도입니다.


도첩제는 출가하여 납세 의무를 버리는 일과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아

군정을 비롯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경전을 외우는 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해 
정포()를 양반 자제는 100필, 서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을 바쳐야 도첩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승려가 되려는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허가없이 승려가 된 자는 구속하여 중벌로 다스렸습니다.

 

 즉, 출가를 제한하는 정책을 통해 승려 수를 줄임으로서

근본적으로 불교의 인적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서산 대사, 사명 대사 등 의승군의 활약으로

조선 조정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약간 좋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서 성리학적 양반 관료제 사회가

더욱 심화되어 불교에 대한 탄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신분은 천민에 가까운 양인 취급을 받거나,

아예 천민이라 할 정도로 격하되었습니다.


스님들은 산성 쌓기, 산성 경비, 각종 부역 등이 부과되어

힘든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양반들과 지방 관리들에 의해 훼불 행위가 자행되고 

탐학과 조롱거리로 전락하여 갖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불교 교단은 유명무실화되었고,

승려들은 깊은 산 속에 은신하며 맥을 잇고자 하였습니다.


이 시기를 불교사에서는 종단도 없고

산사에만 머물렀다는 뜻으로

"무종산승(無宗山僧)의 시대"라고 합니다.

 

(2) 산성 방어와 5규정소 제도

 

<남한산성>


임진왜란때 의승군의 활약을 통해 조선 조정은

출가 승가 집단이 일반 사회 집단보다

더 강력하게 조직적 결속력을 갖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에 착안하여 조선 후기 들어 스님들을

공역과 산성 방비에 징발하는 등 국가의 사역 집단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조선 후기 스님들은 각지의 산성의 축조와 방비에 동원되어

다시 한번 침체의 길에 빠졌습니다.


당시 조정의 불교계에 대한 인식은 양질의 노동력을 소유한

사역 집단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수도 방위의 주요 요새는

북쪽은 북한산성, 남쪽은 남한산성이었습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인조 2년에 승려들에 의해

축성된 직후부터 승군이 주둔하여 수비하였습니다.


승군은 1년에 6차례 교대로

남한산성에 소집되어 서울을 수비하였습니다.


남한산성 내의 개원사에 승군본부를 두어

승군의 총사령관인 도총섭이 주석했습니다.


승군의 편제는 도총섭 1명, 교련관 1명,

상주 승군 138명, 8도에서 소집된 의승 350여명이었습니다.


남한산성 관내의 사찰에 승군을 분산시켜 거주하게 하며

성의 수비를 맡겼습니다.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축조되었는데,

화엄사 출신의 도총섭 성능 스님의 지휘 아래

스님들의 노동으로 쌓은 성이었습니다.

 

북한산성에는 승도대장 및 팔도 도총섭이 머무르는 중흥사를 중심으로
태고사, 노적사, 원각사, 보광사, 보국사 등의 11개 사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찰들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수비를 맡겼으며,

편재는 남한산성과 유사하게 약 500명이 지켰습니다.

이들 의승군들은 1년에 6차례 소집되어

2개월씩 복무하다가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이같은 스님들의 국방 사업은

1895년 갑오경장에 의해

입성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북한 산성>


그런데, 이 산성 수비대의 경비를 국가에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두 산성에 주둔하는 승군은 합쳐서 700명이, 

2달에 1번씩, 1년에 6차례 그 인원(4,200명)을

전국 사찰에서 차출하고 먹여 살리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에서 젊은 스님 수천 명을 동원하기 위해

많은 재력과 인력이 소모되었으니

사찰의 생활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습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승군이 차출되면서

고단한 노역에 스님들은 이탈하고

사찰은 점차 황폐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후기 들어 정기적으로 수천명의 스님들이

전국에서 징발되어야하니

승가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관리가 시급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전국의 스님들을 통제하고 관할하기 위해 

"규정소(糾正所)"를 설치하여 관리하였습니다.


규정소는 개원사(남한산성), 중흥사(북한산성), 용주사(수원),

봉은사(서울), 봉선사(양주)의 5개 사찰에 개설되었습니다.


이들 5개 사찰은 수도권에 있는 사찰들로

개원사, 중흥사, 용주사는 도총섭이 주석한 절이며,
봉은사,봉선사는 조선 중엽까지 선종과 교종의 판사들이

주석한 수사찰로 지방 사찰을 관리 감독하였습니다.

이를 5규정소라고 하는데,

도총섭 3명과 선종,교종 판사 2명이 임원이 되어

불교와 승가의 일을 맡았습니다.

 

봉은사는 강원도, 봉선사는 경기도, 개원사는 충청도와 경상도,
중흥사는 황해도와 평안도, 그리고 용주사는 전라도의 사찰을 관할하며

승려들을 관리하고 통제하였습니다.


즉, 5규정소 제도는 예조의 통제 하에

산성 수비대의 차출 및 승려들을

규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3) 각종 잡역과 양반들의 토색질

 

<화성 용주사>


한편, 국방 사역 외에도 스님들은 신분적 천시를 받으며

제반 잡역에 동원되어 온갖 수탈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잡역 중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종이를 만드는 지역(紙役)이었습니다.


사찰의 종이 공납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어 왔으나,

조선 후기 대동법의 실시 이후 그 양이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일반 민간에서 공물로서 종이를 직접 징수하였으나,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종이 대신 쌀로써 상납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일반 민간의 닥나무 재배는 곡물 재배로 변해갔고 

종이 생산량이 급속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에서 쓰는 종이의 공급원으로서

사찰의 비중이 조선 후기 들어 커지게 되었습니다.


현종 대에 전라도의 경우 큰 사찰은 1년에 80여 권,

작은 사찰은 60여 권에 달하는 지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전국의 사찰은 국가의 지물 생산소로 전락하거나,

각종 공물의 공급처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지리적 여건상 닥나무가 자라지 않는

의성 고운사, 영변 만합사 등에까지 지물 공납이 할당되었습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사찰에서는

별도로 지물을 매입하여 납부하는 불합리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화성 용주사>



한 예로 양산 통도사의 스님들이 종이를 바치는 지역과

양반들의 토색질에 대해 경상도 수군 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이 남아 있습니다.

 

"양반 접대와 각종 잡역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다.
관아에서는 각종 종이를 만들어 내라고

끊임없이 독촉을 하여 밥 먹고 잠잘 틈도 없다.
또, 지역(紙投)으로 인해 한때 5~6백 명이던 승려의 수가

지금은 4~5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노약자를 제외하면 이, 삼십 명이 남는데,

이들 또한 밤낮 없이 종이를 만들고,
양반들의 가마를 메고, 짚신과 미투리까지

토색질을 해대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경상도에서 가장 큰 사찰인 양산 통도사가

이런 지경이니 다른 사찰의 어려움은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찰은 이러한 각종 공역과 함께

지방 관리나 유력자들에 의한

사사로운 징발과 수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사찰은

각종의 진귀한 산채와 산과일, 수공품의 조달이 가능하였고,
이는 양반 관료들 및 지방 아전들의 집중적인 학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목민심서>에 당시의 사찰이 겪었던 비참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반이 반나절을 즐기기 위해 사찰에 찾아오면

노승들은 삼일 동안 쉬기를 잊어야 했다.
하루는 휘장을 치고, 하루는 잔치에 참여하며

나머지 하루는 청소를 해야만 하였다”

1837년(헌종 3) 팔공산 은해사에서는
“관의 부역이 너무 심하고 빈객이 끊이지 않아

스님들은 온 힘을 다 쏟아도 여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화성 용주사>

19세기 중엽 속리산 법주사에서도

국가의 의승역과 잡역은 물론 메주.산채 등의 산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양반 관료가 행차할 때는 절에서 스님들이 가마를 메야 했고,
심지어 향교와 서원, 향청 등의 관리들도 버젓이 특산물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시되었고,

경내에서 음주와 소란, 사냥 등의 무법 행위도 자행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이러한 억불 정책과 각종 공역, 양반들의 토색질로 인해
사찰과 스님의 수는 점점 줄어 교세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최근 조선 시대 사찰 및 승려의 수의 변화를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15세기 말에 1,650여개, 18세기 중엽 1,530여개,

20세기 초(1910) 1,280여개로 집계되었습니다.


더구나 20세기 초의 사찰 수 1,200여 개 중

절반 이상이 암자 규모로 나타나 사찰의 어려움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님들의 숫자도

고려말 조선 초에 약 10만명이 넘는 규모에서

18세기 중엽에는 2만 8천여명,
1910년대에는 8천여명 정도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1/10로 줄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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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조선 왕조 500년 불교 탄압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조선 시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생들이

불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과 종교를 탄압하는

사상적 폭압의 시대였습니다.

 

이들이 불교와 승려에 대해 가했던

폭력성을 다시금 자각하게 합니다.


인도 성지 순례를 가보면 이슬람에 의해

목잘린 불상이나 폐허가 된 폐사지를 볼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조선 시대 유생들에 의한

폐사지와 훼불의 유적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합니다.

유학은 인(仁)을 존중하고 배움(學)을 중시하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태동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유생들이 불교에 행했던 짓은

결코 어질지도 배움에 포용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상에만 고착된 사고와 행동 패턴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 이념에 의한 이념의 차별,

신분에 의한 신분의 차별을 악습으로 고착화시켰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성리학적 가치관이 지배 이념이 되면서

그 폐해는 더욱더 심해지며 불교에 대한 탄압은 심해졌습니다.


스님들은 산성을 쌓거나 산성 경비병으로 근무하게 되고,

관청의 종이, 특산물 공납, 양반들의 토색질 등으로

사찰과 스님의 생활과 압박은 더욱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스님들의 숫자는 줄고, 절은 일부 대찰을 제외하고

생존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채

성리학적 가치관 속에서 억압을 당했던 것이 불교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불교가 500년간 명맥을 유지한채

오늘날 우리나라에 존속하고 있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