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4) - 공명첩과 사찰계>

조선 후기 불교계는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곤궁을 탈피하기 위해 스님들은 환속하거나,
탁발 또는 걸식승으로 떠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관아의 수탈을 피해 절을 비우고
관아와 지방관리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산중 깊숙이 은둔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왕실의 여인들이 보시했던 왕실 원찰이나
큰 절들도 조선후기에는 시주가 적어서 먹고 살기에 허덕였습니다.
도시 주변 절은 ‘무뢰배’들이 몰려들어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춤추는 놀이터로 전락하였으며,
산중의 절은 때로는 화적이나 변란꾼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흔히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변란의 모의에는 거의 어김없이 승려 한 둘이 끼여
참모가 되기도 하고 협조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절은 황폐화되었고,
승려들이 먹고 살 길은 막막하였습니다.
1790년(정조 14) 금강산의 대찰 장안사에는
불과 4~5명의 스님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조선 시대의 사찰 중 15.5%만이
1910년대 초까지 온전히 유지되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환경에서 사찰을 유지하며 살아남는
생존 방식중에 주목할 만한 것이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관아나 권세가에 호소하여
공명첩(空名帖)을 발급받아 이를 되파는 방법이었습니다.
둘째는, 사찰에서 승려들이나 신도들이
여러가지 형태의 계(契)를 만들어
상부상조하며 경제를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1) 생존수단 공명첩
공명첩(空名帖)이란 조선 후기 들어
조정에서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벼슬이나 신분 상승, 부역 면제 등의 내역을 적어
돈을 받고 팔던 일종의 관직을 파는 매관 매직 증명서였습니다.
공명첩에는 명색 뿐인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 고신첩(告身帖),
일반인의 부역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 면역첩(免役帖),
천민을 면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 면천첩(免賤帖) 등
여러가지가 존재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명첩을 발급 받은 사람들은
허울뿐인 벼슬이나 신분을 자랑하며 허세를 부렸습니다.
공명첩은 재정이 궁핍했던 조선 정부가
신분이 엄격한 양반 관료제 사회에서
양반이 되고 관직에 오르기를 갈망하는 부유한 양민이나
양반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매관매직을 하던 제도였던 것입니다.
큰 절에서는 이러한 공명첩을 발급받아
되파는 방식으로 불사나 살림을 영위해 나갔습니다.
즉, 공명첩을 큰 절에 발급해 주고
큰 절에서는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아 불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1793년 금강산 유점사의 승려 돈징이
정조의 어가 앞에서 울면서 유점사의 퇴락을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공명첩 1백장을 발행해 주었고,
유점사에서는 이를 팔아 영산전을 세우고 어필각을 중수하였습니다.
1851년 속리산 법주사 스님들이
사찰을 관장하는 예조에 로비를 벌여 공명첩 4백장을 발급받았습니다.
법주사 승려들은 법주사가
순조의 태봉(胎封:왕이 태어날때의 탯줄)을
관리하는 사찰으로 왕실의 원찰인데도 불구하고 퇴락해져
생계도 꾸려갈 수 없다는 사정을 말하고 공명첩 발행을 의정부에 건의했습니다.
영의정 권돈인이 이를 대왕대비 김씨에게 건의하자,
김씨는 법주사를 비롯하여 각도의 절에 공명첩을
나누어 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뒤 세도 정치를 폈던 안동 김씨들은
여러 차례 공명첩을 공급하였습니다.
조선 말엽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는데,
안동 김씨들은 천주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불교에도 접근하여 지원하였는데,
토지나 전재 같은 현물보다 곧잘 공명첩을 발행하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1854년 영의정 김좌근은 공명첩 1백50장을
유점사에 발행해 주었습니다.
유점사의 산영루는 아주 좋은 풍광을 이룬 건물이었는데,
장마가 들어 붕괴된 후 재건할 수 없어 방치하여 두자
예조 판서 김보근이 이를 둘러 보고 영의정에 건의하여
그 건축비로 공명첩 발행을 주선하였던 것입니다.

1878년에는 함흥의 귀주사에 화재가 나서
절이 깡그리 불타버렸습니다.
귀주사는 이성계가 청년 시절 글을 읽던 곳으로
석왕사와 함께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하던 절이었습니다.
당시 화재 때 이성계의 글씨를 보관한
어필각과 독서당만이 보존되었습니다.
귀주사 승려들은 자체의 힘으로
중건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으며,
이에 함경 감사의 건의에 따라
내탕전 3천 5백냥과 공명첩 5백장을 지급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년 5개월의 공사 끝에 건물 3백여칸을 지었습니다.
내탕고(왕실의 재물인 금·은·비단·포목 등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어고)를
마음대로 주물렀던 명성 황후는 놀이와 굿 비용에 돈을 함부로 탕진하였으며,
왕과 자신 그리고 세자 수복 강령을 빌기 위해서
궁중으로 무당과 비구니를 불러들여 불공과 굿판을 벌였습니다.
불사를 위해 내탕고를 내는 일은 드물었는데,
귀주사의 지원은 특별한 케이스에 속했습니다.
공명첩 발행은 조선조에서 재정보충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부호들이 벼슬을 사서 거들먹거리는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절에도 발행하여 승려들은 이 공명첩을 높은 값으로 팔려고
이리저리 땀 흘리며 뛰었던 것입니다.
절들은 유지비를 마련하지 못해 재정압박을 받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공명첩을 확보하려 노력하였다지만,
국가에서는 함부로 이를 발행하여 관직이 문란해짐은
접어두고라도 승려를 타락의 길로 몰았던 것입니다.

(2) 상부상조 사찰계
조선 후기 불교의 경제 활동은
궁핍한 사찰재정을 유지하기 위한 긴박한 필요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점차 사찰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문적으로 이익 행위를 추구하는 스님이 등장하였고,
영조 연간에 이르면 ‘부자스님(富僧)’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재화를 소유한 스님도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찰의 경제 행위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고,
생산에 참여할 스님 수가 어느 정도 확보된 큰 절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거주승이 단출한 군소 사찰에서
경제 활동은 엄두도 못 낼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에서 승려들과 신도들의
기금 마련을 위해 사찰계가 성립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발달한 계는
대체로 친목을 목적으로 하거나
경제적 이윤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이가 같은 동갑끼리 모인 동갑계,
소를 살 값을 마련하기 위한 우계,
서당의 자금 지원을 위한 학계,
심지어 금비녀를 마련하기 위한 비녀계 등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계 조직이 그대로 ‘억불의 시대’인
조선 후기 불교계에도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틀어 사찰계라 불렀습니다.

이를 상세히 조사한 한상길의 논문
‘조선 후기 사찰계 연구’에 따르면
16세기 중엽부터 1910년까지 사찰계는
모두 2백1개가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또 계의 유행은 ‘신앙 활동으로서의 계와
보사(補寺:절의 살림살이를 도움)활동으로서의 계’로 구분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찰계는 사찰의 재정을 지원하고
공동체적 신앙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결성된 것이며
그 원형은 사명대사가 처음 조직한 갑계(甲契)를 꼽습니다.
갑계란 한 절 안에 있는 승려끼리 모인 조직으로
나이를 12간지에 따라 중간을 가릅니다.
곧 쥐 띠에서 뱀 띠까지 한 무리,
말 띠에서 돼지 띠까지를 한 무리로 묶는 것입니다.
기금은 계원끼리 얼마씩 내기도 하고
위 갑계에서 보조를 받기도 하며
사찰에서 찬조를 받기도 하여 마련하는데,
이를 빌려주고 이자를 받습니다.
또 계원들이 공동 노동으로
절 공사를 도급받아 생기는 돈을
계금으로 넣기도 하였습니다.
계원들이 늙으면 토지를 사서 절에 내기도 하고
또 필요한 불사나 도구 따위를 절에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갑계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계가 있었는데,
목적에 따라 이름도 달라
등촉계, 문도계, 불량계, 상포계, 염불계, 지장계,
청계, 칠성계, 송계, 학계, 어산계, 미타계, 관음계 등이 있었습니다.
이중 사찰 주변의 삼림을 보호하기 위한
송계(松契)는 당시 널리 퍼져 있었으며
불량계(佛粮契)는 벼슬아치나 군인들이
절의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한 것으로 외부 보호의 의미를 지닙니다.
지장계, 관음계, 칠성계는 지장전, 관음전, 칠성전과
같은 절의 건물을 짓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만들어졌고,
염불계는 염불 수행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계를 만들어
같이 염불 신앙을 하며 상부상조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아무튼 사찰을 중심으로 한 계는
당시 사찰과 승려에 관계되는
신앙적, 경제적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동래 범어사에는 19세기 말까지
사찰계 40여개가 활동하여
부자 절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합니다.
예를 들면, 범어사의 경우
1871년 절의 토지가 약 2,000마지기로
500석의 추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러
수확량이 5,000석으로 열배가 늘었는데,
이 중 2/3가 갑계, 나머지는 시주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위 논문의 통계에 따르면,
계는 18세기에 모두 40종,
19세기에 모두 1백30종,
1900년 이후에 모두 31종으로 나타나
그 활동이 19세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이 시기의 불교계가 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한 수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계는 억불의 시대에
사찰의 운영, 승려의 수행,
신도들끼리의 친목과 지원 등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쨌든 19세기 전반기에 불교계는
여러모로 자생력을 키우려 노력하였고
그 결실도 다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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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도 경제 활동이 있어야 운영이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걸식을 통한 무소유적 삶이 가능하지만,
공동생활과 정착 생활을 하는 승가의 운영을 위해서는
경제 활동이 있어야 운영이 됩니다.
오늘날은 재가자들의 보시, 초파일 행사, 재일 제사 등을
통해 사찰 경제가 운영되고 사찰이 존속될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곤궁한 시대에는 사찰 경제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화재 등으로 전각이 소실되거나, 건물이 노후화되면
큰 돈이 들어가 신축 또는 보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권력이 있는 관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명첩을 발급받아 되파는 방식으로 사찰 재원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사찰계를 통해 상부상조, 협업하는 방식으로 돈을 모으고
사찰을 존속하기 위한 경제 활동을 해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큰 절 중 대다수가 조선 후기 때 중창된 절이 많습니다.
절의 중창과 관련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사찰은 안팎으로 관청에 주청하고 계를 모으는 등
여러 많은 노력을 통해 사찰을 유지하고 운영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힘든 삶 속에서 사찰을 운영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스님들의 노고를 다시금 생각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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