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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1.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3) - 땅에 떨어진 승가의 권위

by 아미타온 2025. 9. 17.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3) - 땅에 떨어진 승가의 권위>

 

<안성 청룡사 대웅전 석가삼존불>


조선 후기 들어서는

부담스런 군역과 부역을 피하고

관권의 수탈에서 벗어나려고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연달아 도는 역질과 흉년을 피하기 위해

절의 공양주나 불목하니가 되어 

밥을 얻어먹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들어가 만행이나 탁발을 핑계대고

떠돌아다니는 유랑승 그룹도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에 대해

실학자들 중에 불교의 폐단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초반의 실학자 유수원은

불교가 가장 침체한 시기에도 승려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군역과 부역을 피하기 위해 출가한 자들이 많다고 말하며

출가 제도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8세기 후반기를 살았던 실학자 이익은

나라를 좀먹는 6가지를 지적하였는데,

노비 제도, 과거 제도, 문벌 팔기,

광대와 무당, 비구와 비구니, 게으름뱅이를 들었습니다.

 

<안성 청룡사 마당>

 

이익은 <성호사설>을 통해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중들은 부처를 받들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여러가지 부역을 도피할 생각으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날마다 옥토에서 나는 곡식을 축내는 무리이다."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절을 도피처로 삼으면서

승려의 자질은 더욱 하락하고 승려들은 천민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사회 불만 세력과 결합하여 세상에 저항했고,

사찰이 그 근거지가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모습은 '활빈당'과 '땡추(당취승)'라는

독특한 활동 방식과 미륵 신앙의 유행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울러 일부 승려들과 신도들 중에는

풍악과 웃음을 파는 사당패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도피 차원에서 출가한 자들 중 일부는 온갖 파계를 저질러

승려가 놀이판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안성 칠장사>

(1) 활빈당과 땡추승 조직의 활동 

 

"활빈당(活貧黨)"은 조선 중기 허균이 쓴

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로운 도적입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조선 순조에서 철종까지 이르는 시기,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군역, 부역의 부담과 관리의 수탈,

흉년, 괴질이 들면서 민중들의 살림살이는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이 시기에 실제로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무리가 나타나

양반 부호의 집과 시장을 약탈하여

생활이 어려운 농민들에게 약탈한 물건을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안성 칠장사 일곱 도둑과 혜소 국사>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주로 사찰에 은거하였다고 하는데,

청도 운문사와 양산 통도사가 대표적인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활빈당원의 구성 비율은 상인 39%, 농민 10%, 걸인 10%, 승려 7%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승려들도 이러한 무리에 동참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또한 ‘땡추’들이 돌아다니며 무리를 모았습니다.

 

땡추는 한자어인 ‘당취(黨聚)’의 전음인데,

‘떼지어 모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작은 암자나 도시 주변의 절을 중심으로 모여

여염집에 출몰하였으며 비밀 조직을 만들어 처사, 거사와 손잡았습니다.

 

조직원들은 동료가 어려운 일에 처하면 도와주고

압제를 받으면 복수하는 등 단결력을 과시하였습니다.

 

땡추들은 드라마의 산적이나 화적떼처럼 산과 도시를 넘나들면서

자기네 조직원끼리 알아볼 수 있는 옷이나 암호 따위 신표를 지녔습니다.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회 변혁 세력과 손을 잡고

때로는 민심을 충동하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15세기 말 정읍 내장사의 승려들이 집단을 이루어

관가의 재물을 털고 양반 부호의 집을 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조사해보니 무사, 서얼, 노비 등

다른 사회 불만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땡추의 조직과 강령, 활동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18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이들이 사회 불만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안성 칠장사 대웅전 부처님>

 

1767년 이영창 등의 역모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서자인 이영창은 명나라가 망한 뒤

망명해 온 금강산의 승려 운부가

제갈공명과 같은 큰 인재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운부의 제자 1백명이 전국에 퍼져 있는데,

도둑의 괴수 장길산과 연결되어 있으며,

진인 정씨와 최씨가 가담했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조선에 정씨 왕국을 세우고

중국 청나라를 쳐서 천자국을 세울 것이라 호언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고변자에 의해 발각되자

조정에서는 운부와 장길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하여 승려를 수색하느라 절마다 큰 소동이 일어났고,

승려에 대한 수색이 강화되어 승려들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서자와 의적 등의 사회 불만 세력이 

승려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안성 칠장사 미륵불 석불>

 

1728년에는 이인좌 주도의 변란이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인좌가 충청도에서 거사하자

정희량과 이웅보는 경상도 일대에 격문을 돌리고

거창, 합천 등지를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한 지리산 세력이

동쪽의 대원사 골짜기와 쌍계사 연곡사에서 출몰하였습니다.

  

그런데, 관군 쪽에서는 이들 지리산 세력의 두목을 

승려 대유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대유는 수천 명의 도당을 거느리고

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이인좌가 잡힌 뒤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불만 세력의 역모나 반란에 승려들이 연루된 것은

19세기에도 계속 등장하였습니다.

 

<안성 태평 미륵>

 

 한편, 이렇게 시대 상황이 어려울수록

민간 신앙과 변혁 사상이 결합하여

민간과 절에서는 미륵 신앙이 널리 퍼졌습니다.

 

17~18세기 가난하고 작은 사찰에서는

미륵경을 자주 찍어 유포하였습니다.

 

이들은 미륵경을 독송하며

미래불인 미륵이 현세에 도래하여

빈부와 신분의 차별이 없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가 없는

이상 세계가 열릴 것을 열망하였습니다.

 

미륵불은 민중이 열망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일부 거사패는 미륵 신앙을 부추겨 민심을 충돌질하였습니다.

 

양주 땅에 근거를 둔 여환은

"석가의 시대가 가고 미륵의 시대가 도달하였다."고 변혁을 도모했습니다.

 

<안성 청룡사>

 

(2) 사당패의 활동과 승려의 희화화

 

원래 불교에서는 남자 신도를 거사,

여자 신도를 사당이라고 부릅니다.

 

예로부터 큰 사찰은 불교 의식에 필요한

악기를 다루는 기능을 지닌 스님들을 도제식으로 운영해 왔습니다.

 

이들은 사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부 승려와 신도들이 패거리를 조직해서

각 지방을 돌며 풍악을 올리고

춤과 노래, 여러가지 재주로 시주와 행상을 해서

그 수입으로 불사와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을 사당패라고 불렀는데,

조선 후기에는 주로 사찰이나

사하촌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방편이 목적이 되어 차츰 절을 돕는 일보다는

춤과 노래, 웃음을 파는 조직으로 변모해 갔다고 합니다.

 

이들 사당패는 전국에 걸쳐 활동하였는데,

조선 후기 경기 지역의 중심지는 안성의 청룡사였습니다.

 

<사당패가 공연했던 안성 청룡사 마당>

 

조선 후기 들어 군역이나 부역을 피하기 위해

출가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중 일부는

수행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워

여러가지 파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승려들은 민중의 눈에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탈놀이, 인형극 등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탈놀이나 인형극에는 승려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승려들의 모습을 통해

서민들의 정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성 청룡사 사당패 바우덕이>

 

먼저 안동 하회 별신굿의 탈놀이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탈놀이의 3번째 마당인 "파계승 놀이"가 본막에 오릅니다.

 

먼저 각시가 탈을 쓰고 나와 한창 춤을 추고 있노라면

탈을 쓴 승려가 나와 각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승려가 각시를 업고 달아납니다.

 

이어 선비, 양반, 하인들이 나와

승려가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양반과 선비는 세상이 막돼어 간다고 한탄하나,

하인들은 즐거워하면서 서로 껴안습니다.

 

<바우덕이 사당>

 

한편, 산대도감 꼭두각시 놀음의

박첨지 마당의 "절 짓고 휘는 허리" 라는 막이 오르면

"상좌들이 나와서 절에다 시주를 하면 자식 많이 낳고

부귀 공명을 누리게 된다고 하면서 절을 짓는다.

그리고, 절이 다 완성되면 이번에는 그 절을 다시 헐어낸다"라는

장면을 연기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선비가 나와서 

이러한 불사에만 집착하는 승려를 꾸짖습니다.

 

"여봐라. 듣거라. 보니 거리 노중이냐?

보리 망종이냐? 칠월 백중이냐? 네가 무슨 중이냐?

염불엔 마음이 없고 잿밥에 마음이 없어

비색을 데리고 춤만 추는구나.

나도 한번 놀아보자."고 말합니다.

 

탈놀이, 인형극 등의 연극에는

노승, 상좌, 파계승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풍자의 대상입니다.

 

염불이나 수도는 팽개치고

술먹고 고기먹고 과부,처녀,기생 등과 색욕을 밝힙니다.

 

상대적으로 벼슬아치나 양반, 선비들보다는

그 풍자의 정도가 그리 강렬하지는 않으나,

당시의 지배 세력과 한 통속으로 몰아가면서도 

자기네와 같은 인간으로 애정을 보내었습니다.

 

조선 후기 승려들의 자질이 하락하고

승려들의 파계 행위가 많아짐에 따라

승려들이 존경의 대상보다는 천대하는 경향이 심해졌고,

승려의 호칭도 "중"이라 부르며 멸시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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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 석불상>

 

옛날에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성철 스님이 한국 불교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스님들에게 3배를 하도록 해서

스님들의 권위를 회복하게 한 부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절에서 스님들께 삼배를 하면서

스님께 예경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방 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절을 하는 것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주자인 신도를 보고 스님들이

"보살님","처사님"하면서 상전으로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은 1982년의 5월의 한 법회에서

1947년 봉암사 결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신도들에게 보살계를 시행하려 하면서

참석한 신도들에게 스님들께 절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신도들의 머릿 속에 있는

스님은 조선 시대 천민의 연장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은

스님들에게 절을 하라는 성철 스님의 요구에

어안이 벙벙해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철 스님은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당신네들이 여태까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네들 보고 절한 적이 있나?

생각해 보시오.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들한테서 법을 배우는 사람이야.

당신네는 제자이고 스님은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나?

조선조 5백년 동안에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

 

성철 스님 말씀대로 조선 후기 한국 불교는

스님들이 신도로부터 공경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위신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스님들이 천민으로 전락되었고,

스님들의 삶이 지극히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의 가장 중요한 근본은 출가 정신입니다.

 

도를 구하기 위해 세속을 떠나 수행하는

출가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고,

출가 정신으로 자신의 서원을 올곧게 세워야 합니다.

 

조선 후기 억불 정책과 불교 탄압 속에서

이와 같은 스님들의 근본인 출가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출가 승려로서의 생명을 잃고

세속화의 길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 출가 승가의 모습을 보면

민중들의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자존과 권위가 땅에 떨어진 희화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종교인이 종교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때,

종교 지도자가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공경을 받을 때에

그 종교가 생명력을 갖고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땅에 떨어진

불교와 승가의 모습에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