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6) - 서양인이 본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

조선 후기 사찰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이 서양인이 남긴 자료입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을 여행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그 책 속에 1894년 금강산 일대의 산사를 순례하고 남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후기 사찰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목사의 딸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사벨라 비숍(Bishop,1831~1904)은 세계 각지를 여행했습니다.
그녀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터키와
쿠르키스탄, 페르시아와 티베트를 거쳐 일본과 말레이반도,
중국과 러시아 특히 만주에서 시베리아까지 여행하였습니다.
그리고, 1894년 예순이 넘은 나이에 드디어 조선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1897년까지 한국을 4번 방문했으며,
고종과 명성 황후와도 친분을 쌓았다고 전합니다.
그녀는 1894년 4월 미국인 선교사와 통역, 머슴을 대동하고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 단양까지 답사하고,
다시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거슬러 가평, 춘천 등의 한강 일대를 여행하였습니다.
그 뒤 얼마간 휴식을 취한 비숍은 조랑말을 타고 금강산 여행에 나섰습니다.

(1) 금강산의 관문 단발령에 서서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초입에 관문이 있습니다.
강원도 희양 천마산에 있는 단발령(해발 1241미터)입니다.
'단발령'은 금강산의 절경을 보면
머리를 깎고 입산 출가하게 된다는 데서 연유합니다.
"조선의 호불왕"이라 일컫는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는 고개입니다.
세조는 말년에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즉위 후 11년이 되었을 무렵,
참회 백일 기도를 올리러 금강산 유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단발령에 이르러 금강산의 절경을 보고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해
자신의 욕망의 덧없음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수행했던 신숙주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극구 만류하는 통에 다시 마음을 돌렸습니다.
한번 결심한 이상 머리는 잘라야겠다고 말하고,
결국 머리의 변두리만 남기고 가운데는 깎았다고 합니다.
단발령의 유래입니다.
비숍은 그 단발령에서 금강산 비로봉 정상을 바라본
첫 소감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정상을 올려다보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구비구비 이어진 숲의 물결,
시냇물들의 아스라한 반짝임,
구릉의 완만한 선들...
그 뒤로 해발 1,638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한 약속의 땅(A fair land of promise)이다.
진정코!"

(2) 금강산의 사찰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를 방문하고
금강산의 "금강"은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금강산은 809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도 108사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많은 절과 암자가 있어서 조선 제일의 불교 영지로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금강산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53불로 유명한 유점사입니다.
이외에 표훈사, 신계사, 장안사가 금강산 4대 사찰로 유명합니다.
비숍은 금강산 서쪽에 자리한 장안사를 제일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장안사는 551년 고구려 혜랑 스님이 창건하고,
773년 신라 진표율사가 중창한 유서 깊은 절입니다.
"장하던 금전벽우 잔재되어 남은 터에~~"
라는 가곡 "장안사"로도 유명한 절입니다.
절 입구에는 조선왕실의 수호를 상징하는
홍살문이 놓여 있어 왕실의 원찰임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홍살문 : 왕능·궁궐·관아 등의 정면 입구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장안사에는 전각과 당우,
그리고 참배객들의 조랑물을 묶어두는 마굿간,
스님들의 요사채, 공양간, 절의 하인들과 행자들을 위한 숙소,
넓은 접객실, 비구니 승방 등이 있었다고 비숍은 전합니다.

이외에도 절름발이, 귀머거리, 장님, 과부, 고아, 극빈자 등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숙소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식객은 100여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절로부터 대접을 잘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장안사에는 일반 객실 이외에도
관광차 금강산에 오르는 관리들이 이용하는 관사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100여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일반적인 절에서는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이 같이 살지 않는 것이 법도인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절에서는 9시가 되면 모두 잠들었고,
새벽 4시가 되면 스님들이 법당에 모여 예불을 올렸다고 합니다.
비숍은 장안사에서 2일을 머물렀는데,
'천국에서 보낸듯하다'고 경관의 아름다움에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비숍은 장안사 북쪽에 있는 표훈사로 가는 고개를 넘다가
절경에 반해서 이와 같이 금강산의 절경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제일의 장관이자
확실히 일본에서도 심지어 중국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표훈사에는 15명의 스님들이 살았으며,
매우 친절했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표훈사에서도 새벽 4시만 되면 스님들이 일어나
말끔히 의복을 정제하고 유쾌한 표정으로
법당에서 우렁한 목소리로 예불을 올렸다고 합니다.
당시 표훈사에서는 우유나 달걀조차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가 뿌리내려 있었고,
어디에도 가축을 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숍도 채식에 적응하기 위해
밥과 차, 꿀물, 잣 등으로 아침을 먹어야 했습니다.
표훈사 스님들도 주로 꿀과 잣으로 영양 보충을 했으며,
이것은 모두 절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비숍은 표훈사를 떠나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유명한
마하연사와 보덕암을 거치면서
'이 아름다움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3) 유점사 스님들의 삶
그리고, 금강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사찰 유점사에 도착했습니다.
유점사는 금강산 일대의 수사찰로
일제 시대 때는 31본산으로 지정되어
금강산 일대의 절과 암자들을 관장했습니다.
당시 유점사에는 70명의 비구 스님과 20명의 비구니 스님,
그리고 200여명의 부목과 목수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솝이 방문하자 유점사의 주지 스님을 비롯한 승려들은
비숍과 선교사 밀러를 맞아 유점사의 역사와 설화를 들려주었고,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서로 토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점사 산사의 문화에 대해 비숍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자상한 접대와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어디서나 만날수 있는 그 잘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거만함,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는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비숍은 여자나 외국인에게 대하는
유학자들의 뻣뻣한 자세와는 달리
격의없이 친절하게 대하는 스님들에게
상대적으로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금강산 사찰 승려들의 생활
당시 금강산의 사찰에는
대략 500여명 정도의 비구와 비구니 스님이 살고 있었다고 하며,
이들은 무명이나 삼베옷을 짜서 입는 것으로 상징되었다고 합니다.
행자들은 거의 1천여 명을 헤아렸으며,
그 중 거의 7~8할은 4대 사찰 안에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고승을 빼고는
누구나 바가지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탁발을 했으며,
매우 독특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목에 염주를 걸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승려들은 산 아래에 있는 사찰 토지의 경작과,
소작료, 신도들의 시주,그리고 탁발로 모은 양식으로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탁발은 멀리 서울 4대문까지 다니기도 했는데,
'예전에는 4대문 안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나,
최근 정부의 포고령에 의해 최근에는 점점 출입이 자유로워지고 있다."라고
비숍은 적고 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포고령 이후로
승려의 서울 도성 출입이 완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탁발승들이 이집 저집에서 염불을 하면
음식이나 숙박, 얼마간의 돈이나 곡식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확고한 신앙으로 믿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불당을 증축하거나 중창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비용은
대부분 서울이나 남부 지방에서 거두어졌다고 합니다.
사찰은 주지 스님이 관장하였는데,
명복상으로는 매년 선출하지만
실제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몇 년간은 유임하였다고 합니다.
비숍은 스님들의 수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았습니다.
'고아나 가난 때문에 부모들이 절에다 바친 아이들이 대부분'
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비숍은 한국의 불교와 스님들에 대한 평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 천혜의 자연 속에서
최고의 부지를 소유하고 있는 불교.....
지금에 와서는 불심이 쇠하고
불교가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고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손 치더라도,
좋은 위치 때문에 여전히 많은 신자들을 끌여들이고 있다....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
불교의 역사나 교의에 대해서,
불교 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채로
대부분의 승려들이 그저 '공덕'을 쌓느라고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려들에 대한 내 인상은 그들의 종교적 수행이
그들 스스로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신앙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반적으로
불교의 전체적인 타락에다 그 원인을 돌린다....
그러나, 낭만적이고 고립무원한 환경 속에
묻혀 지내는 그들의 삶의 질서와 정적,
평화로운 은신처를 구하는 노인과 황폐한 자들에 대한 자비심,
그리고 무엇보다 정중하고 후한 대접은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단단한 매력이 풍겨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그들의 결함보다는 미덕을 존중하고 싶다.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그들에게 나는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었고,
또한 절 경관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사원에 꾸며진 장식 등
자연과 잘 어울리는 종교예술에도 마찬가지로 공감했다..."

* 사진 참조 : 1924년 Curzon후작의 금강산 답사기행/ 와플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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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의 특색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절이 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 불교의 모습을 '산중불교(山中佛敎)'라고 합니다.
비솝의 글 속에는 산중 불교의 모습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산중 불교는 우리나라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환경적 조건과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던 산악 신앙에도 연유가 있지만,
조선 시대 때의 억불 정책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억불 정책으로 도심에 있던 사찰들은 모두 없어지고,
산중으로 쫓겨 나거나 산중에 있는 사찰만이 살아남았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측면이 강합니다.
절은 수행자들의 수행터이자
재가 신자들의 교육과 포교의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조용하고 고요하여 세속적인 삶을 떠나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수행적 조건과 함께
도시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쉽게 찾을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절의 위치는 세속을 떠나서 산의 기운을 느끼며
명상할 수 있는 조용한 수행처로서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산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기운과 정화의 힘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일상을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강산 사찰을 여행한 비숍이
"마치 천국에 온듯하다"고 격찬을 했듯이
천혜의 자연 속에서 최고의 부지를 소유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러나, 너무 산중에만 머물러 있어
은둔적이고 폐쇄적인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깥 세상과 토론하고 탁마하며
세상과 호흡하며 불법을 폭넓게 현대화하지 않는 점.
일반 대중들에게 포교와 교육을 통해
불법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
일반인이 찾기에는 사찰의 벽이 높다는 점
등이 산중 불교의 한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억불의 시대에서 벗어난 현대의 우리나라 불교는
깊은 산에서 많이 내려와 세상과 호흡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속의 최고의 부지에만 의지하는 불교가 아니라,
대중들과 호흡하고 자신의 공부를 개방하고 토론하는
불교로서 바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숍의 글을 보면 조선 후기 산중 불교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금강산에 자리잡은 금강산 사찰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걸인과 같은 황폐한 사람을 받아주는
자비로운 옛날 절의 정감과 자비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탁발을 하면서 양식을 얻으러 다녔던
스님들의 고단한 모습에는 딱한 생각과 함께
스님이면서 자신이 믿는 불교의 가르침에 무식했던
당시 스님들의 모습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나기도 합니다.
아무튼 서양인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 불교의 모습은
이와 같은 시각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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