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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2.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19세기 조선의 상황(1)

by 아미타온 2025. 10. 3.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19세기 조선의 상황(1)>

 

<개화당>


 
19세기 조선 후기 사회는 내외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태동하는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1800년경부터 당파의 갈등도
노론 측의 일방적 승리로 귀착되어
노론 또는 한 문중이 권력을 독점하고 세도를 부렸습니다.
 
일명 '세도 정치'의 시대입니다.
 
부패한 세도 정치 하에서 매관 매직이 성행하고
양반 신분까지 사고 파는 등 사회의 기강은 무너질대로 무너졌습니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는 것으로 보상을 받으려 했고, 
이는 무지막지한 세금 징수로 이루어졌습니다.
 
경작하지 않는 빈 땅과 어린아이,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거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때로는 무리를 지어 봉기를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전염병이 자주 창궐하고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조선 후기 들어 민중 봉기가 자주 빈발한 것은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한편, 신분제 사회의 동요가 심화되어
경제력에 따라 신분의 상승이 일어나서
전통 신분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동학이나 천주교와 같은
신흥 종교, 사상들이 생겨나거나 유입되었습니다.
 
이들 사상은 근대 평등 사회로의 전환을 요구했습니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열강 및 일본 등에 의한 통상 요구로
'쇄국'과 '개화'를 둘러싼 대결 국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에 의해 개화가 이루어진 후
새로운 사회 건설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갈등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격동과 변혁의 시기에
외국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화를 통해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주장했던 젊은 그룹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바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필두로 한 '개화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개화당의 젊은 기수들에게
개화 사상을 고취하고 가르쳤던 개화당의 숨은 주역들은
중인 계층으로 의사였던 유대치(유홍기),
역관(통역관)이었던 오경석, 그리고 승려였던 이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불교를 신봉한 불자였으며, 
개화당의 젊은 기수들에게 불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김옥균,박영효 등도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대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시대를 이끌어 간다고 합니다.
 
불교 사상을 가졌던 이들이 
19세기 격동의 시대에 '개화'라는
현실 정치 운동을 추진해간 모습을 보면서
불교도인 우리가 현실과 시대와 어떻게 호흡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공부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들 개화당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이 살았던 19세기 조선의 사회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조선 후기 가족 사진>

                                                            

(1) 19세기 조선 사회 민중들의 삶

 
19세기 조선 민중들의 삶에 대해
의식주와 같은 일상적인 삶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 민중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으며,
그들이 품고 있던 희로애락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의식주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먹는 먹거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 평균 쌀 2되를  먹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환산을 해 보면  대략 1.2리터의 분량입니다.
 
한편, 당시 호적 문서에 나타난 것을 보면
조선 시대 1호당 평균 가족 수는 3.95인으로 나오는데, 
이는 16세 이하에 해당하는 조세에 대한 책임이 없는
연령층은 제외가 되었습니다.
 
이들 16세 이하의 연령층을 가구당 2명으로 감안할 때,
조선 시대 1호당 평균 가족수는 6명 정도로 생각됩니다.
 
6인 가정이 하루 1.2리터 정도의 쌀을 먹었다는  것을 기초로
이들이 1년간 소비하는 식량과 조세 등을 감안한다면
한 가구당 2결  내외의 토지를 가져야 생활이 영위된다고 보여집니다.
 
즉, 이들이 삼정(三丁)의 국가 의무 체제하에서
전정(田丁, 세금)을 납부해야 되고,
군정(軍丁, 군역)을 짊어져야 했고,
또한 환곡(環穀, 곡식 대부)에  따르는
각종 부담을 짊어져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1년 동안 먹고 살고,
정부의 조세에 응하는 정도를
순수 계산 하면 2결  정도의 토지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19세기 토지 소유관계에  대한 연구를 참고해 보면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부농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1결 미만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빈농들이었습니다.
 
이는 19세기를 살았던 대다수가 식량(먹거리) 문제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당시 농민들은  하루에 두끼 내지는
세끼를 먹었던  것이 기록에 나옵니다.
 
9월부터 2월까지의  농한기에는 두끼를  먹고,
3월부터 8월까지는 농번기에는 세끼를  먹었다고 합니다.
 
식사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하루에  두끼를 먹는 것이  관습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합니다.
 
한편, 당시에 단백질 공급도 상당히 부족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민중들의  건강과 수명은 크게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높은  유아 사망률로 말미암아
평균 수명이 매우 낮았던 것으로  되어 있고
유아 사망율을 감안할 때 당시 평균 수명은 20세  미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19세기의  먹거리 문제를  통해서
19세기 토지 문제의 심각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결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어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이 1결 미만의 영세한 토지를 갖고 있다고  할때 
그 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가 위협받고 있는  사회라고 할 때
기존의  정치 사회 제도나 가치관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일반 민중들의 삶을 보면서
개화당의 성원들은 개화를 통해
선진 문물과 선진 제도의 도입과 개혁을 통해
민중들이 더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민속화>

 

(2) 사회 신분 제도의 변동

 
조선 왕조는 15세기(1400년대)를 전후하여
유교적 신분제 사회 질서가 확립됩니다.
 
즉, 조선 전기에  양반, 중인, 양인, 천민의 
4가지 신분 체제로 고정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18~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조선 사회는 급격한 신분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우리는 경북, 대구 지방의
호적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대구에는 1690년부터 1858년까지의 호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1690년에는
양반 호가 전체 대구 호수의 9.2%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양인 또는 상인이라고 하는  양인호가 53.7%,
노비호가 37.1%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 됩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와서는
양반호가 전체 호의 70.3%로 급격히 팽창합니다.
 
9.2%에서 70.3%로  급격히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양인 호는 53.7%에서 28.2%로 나타나고, 
반면 노비호는 37.1%에서 1.5%로  급격히 감소합니다.
 
즉, 19세기를  전후한 조선 사회에서
전통적인 4개의 신분 체제가 무너져 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조선 후기 들어 노비 수가 급속히 감소해 갑니다.
 
노비의 감소는 양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양인 중 대다수가 양반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19세기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두 개의 신분의 반상 체제로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전기의 관념에서 양반은 지배층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의 집권 양반들로
토지 경제를 기반으로  해서 사회적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양반 가호가 70% 이상이라는 것은
조선 전기의 지배 신분층이나 양반 지주라는 개념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양반의 대다수가 자신의 신분을
양반으로 상승시켜 올라갔다 하더라도
일반  양인이나 진배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잔반'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양반이 잔반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당대 양반 사족들이 일반 양인의 소작인으로
전락해 가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까지의  우리 사회는
경제력과 신분 변화에 있어 역동적인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양반이라는 특권적 신분의 상실과 함께
양반 이외의  다른 신분층이 새롭게 사회의  주인공으로
대두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조선 전기 차별을 받던
서얼(서자)의 지위도 향상됨을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오면 규장각 검서관을 비롯해
서얼(서자)들이 관직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19세기에는 서얼(서자)들이 관직에 오르는
소통의 폭은 더욱더 넓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양반 지배층이  몰락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서얼 차별이라는 의미가 변해 갔던 것입니다.
 
개화당을 지도했던 유대치, 오경석은
'의사'와 '역관'이라는 직업을 가진 중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이들은 양반과 다름없는 신분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명문 귀족이었던 김옥균,
왕의 부마(사위)였던 박영효 등이
이들에게 배움을 가진다는 것은
과거 조선 전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조선 사회에서 이것을 심하게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신분제가 완화되고 평등에 대한 의식이 깨어가고 있었슴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민속화>

 
한편, 조선후기 들어 농민층이 분해되고,
협호, 유민의 방랑 농민들의 증가도 주목됩니다.
 
조선 시대 양인의 대다수는 농민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농민들은 경제력의 향상과 의식수준의 향상으로
상층 양인 내지는 양반 신분층으로 상승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층에서 양반으로  상승해 올라간 사람들이
곧바로 전통적인  지배 양반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상층 양인 내지는 중간 계층인  중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지만,
신분 상승의 배경이 바로 경제력의 상승과 의식수준의 향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성공한 농민들은 자신의 신분을 향상시켰지만, 
대다수 농민들은 가난한 무전(無錢) 농민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경작하던 토지마저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토지를 상실하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소수의 서민 지주들이  등장하고
전통적인 양반들도 그들의  지주권을 강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영세 토지 소유자인 빈농들은 몰락을 강요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몰락한 농민은 그 지역에서
소작을 따내려는  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소작을 얻을려는 경쟁에 뛰어들게 되고,
이런 경쟁으로 인해 더욱 소작권은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경쟁에서 탈락하게 된  많은 농민들이 생기게 되어 
농촌 사회에서는 상대적인 과잉 인구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과잉 인구층들이 다른 지역으로 방출당하게 되었고,
이들은 '협호' 또는 '유민'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협호는  주인 집에 같이 협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협호와 류민의 증가는  19세기 조선 시대
농촌 사회가 겪고 있던 아주 중요한 현상이 됩니다.

유민의 증가 현상은 18세기 말

경상도 단성현(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의
호적 분석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18세기 말엽의  단성현의 호적을 분석해 보면 
단성현 호구의 67%에 이르는 인구가 
자신이  원래 살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유망)를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선 사회를 파악할 때 토지 경제를 중시하고
그 토지에 농민이 속박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농민을 토지에 속박시켜
그 농민을 대상으로 세금를 수취한  것이 조선 왕조의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그 체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단성현의 호수 중에서 27년간 67%가 이사와 유랑을 한다는 것은
매년 대략  5% 호수의 이동이 꾸준히 진행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농촌 사회가 붕괴되는 때가 19세기 조선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들 협호들과 유랑 농민들이 조선 후기 민란의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랑 농민들의 민란 (드라마 중에서)>

 (3) 기근과 민란


한편 조선 후기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근과 전염병의 문제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기근과 전염병은 조선 후기 사람들의 삶에 큰 위협을 주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기근에 관한 기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후기의 기근은 가뭄과 한발(저온 현상)과 관련해서 일어납니다.
 
조선 18대 현종 연간에서 25대 철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기근으로 모두 52회가 나오고 있습니다.
 
200여년 동안 52회의 기근에 대한 대책을
중앙 정부에서 세워야  했던 것이 바로 당시 사회였습니다.
 
특히,  기근이 매우 심각하게 전개되었던  때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이었습니다.
 
17세기 말의 기록이긴 하지만, 
전국 각 지역에서  보고된
기민(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의 숫자가 69만명 정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한해  동안 기근 때문에
굶어 죽은  기아민의 숫자가 19,000여명으로 보고가 됩니다.
 
그런데, 당시 지방관들의 경우에는 기근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들을 축소 보고 하였습니다. 
 
18세기 후반기 일부 지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기록인데,
기아민의 숫자가 너무 적다고 독촉을 하니까 당장에 3배로 느는  경우도 나옵니다.
 
즉, 한해동안 70만에 이르는  기아민들과
2만여명에 가까운 아사자들이 나타나고 있던 사회가  조선 후기 사회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기록을 보면 걸핏하면 '100년만의  기근'이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만큼 기근의  피해가 심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전국적인 규모의 기근도 있었지만, 
각 지역에서 국지적으로 전개된 기근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 3년이나 4년 마다 기근 대책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기근을 당하게 되면 유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게 됩니다.
유민이 되어서 떠돌다가 어린이가 거추장스러우면 어린애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어린이를 버리고 가는데 쫓아오면 
나무에 붙들어 매어놓고 도망갔다는 비참한 기록이 도처에 나옵니다.
그리고, 또한 기근이 들었을 때 자신의 아들 딸을 잡아먹은  기록까지 나옵니다.
 
이것은 충청도 연산에  있었던 어떤 여종의 기록인데,
5살의 딸을  잡아먹어서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기근이라  하더라도 자식을 잡아먹을 수  있느냐 해서
지방관에서 그 사람을  붙들어다가 심문을 하니까
기근이 들어 아이가 굶어 죽었기에 아이를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살벌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조선 후기 우리나라 사회였습니다.
 
기근이 당시 사회를  강타한 충격은 매우 컸고, 
심각한 기근이 지나가면 정부에 대한 불신 내지
각종 저항 운동이 고조되었습니다.
 

<역병 전염병(드라마 중에서>

 

(4) 전염병과 의술

 
한편 기근과 더불어  주목을 해야 할 것은
조선 후기의  전염병에 관한 문제입니다.
 
조선 후기의 전염병 중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던 것은 콜레라(역병)이었습니다. 
 
전염병의 전파 루트는 평안도 의주나 경상도 동래를 통해서
남행하거나 북행하는 전파 루트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우리나라로 이동하여 심각한  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종에서 철종 기간에 10만명  이상이
한해 동안 전염병으로 죽었던 적이 모두 6차례 나옵니다.
10만명 이하의 사망자를 낸 전염병의  경우도 60여 차례가 나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전염병은 1693년 숙종 연간의  전염병과
19세기 초엽 순조 연간의  전염병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1821년 콜레라의 유행으로 전국에서 수십만명이 죽었던 기록이  나옵니다.
수십만명은 결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콜레라  이야기를 할 때
1860년 우리나라에 왔던 서양 선교사가 
순조 연간 1821-2년에 유행했던 전염병에 관한 기록을 남긴 바 있습니다.
 
1822년에 일어났던 전염병 이야기를
40년이 지난 다음에 할 때도 벌벌 떨면서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과정에서 온 가족이 죽는 예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다 죽고 마을 전체가 비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우리 나라가 당한
인구 손실을 대략 5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병자호란의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나라에서 30만명의 인구가 청나라로 피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구 손실이
당시 사회 경제적 문제와 인륜 도덕의 파괴라는
사회 동요의 문제로서 다가왔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전쟁으로
30-50만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에 대해
하나의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을 만큼 주목합니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20-30만명이
쓰러져간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무관심합니다.
 
조선 후기에 전염병이  일어나면
중앙 정부에서는 비변사가 직접 전염병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비변사는 국방을 담당하는 조선 후기 최고 의결 기관이었는데,
비변사에서 대책을 마련할 정도로 전염병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논의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선 후기 사회를 바라볼 때
조선 후기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1년에 10만명 이상이 죽은 비참한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조선후기에는 많은  양반 지식인들이
의학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종전에 조선 왕조의 의학은  중인의 학문이었습니다.
양반 사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격이 낮은 학문이었던 것입니다.
 

<대구에 세워진 근대 병원>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양반 지식인들이 의학을 연구합니다. 
 
정약용이 <마과회통>을 통해서 종두법을 소개했고,
이제마가 <사상의학>과 같은 새로운 의학의 흐름을 개척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정약용, 이제마와 같은 지식인이
의학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양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년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지식을 가진  사람이면 자신의 지식을 생명을 구하는데 동원해야  했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양반 지식인들이 의학을 연구해서
'유의(儒醫, 선비 의사)'라고 하는 명칭이  생겨나게 됩니다.
유의를 단순히 신분적으로 강등당한 몰락한  양반들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의 철학이 변했고,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변했기 때문에
종전에 중인지학으로 천대를  받던 의학에 과감하게  투신하여
'인간 구제'를  위한 새로운 학문을 개척을 해 나갈려고 했던 것입니다.
 
개화파의 정신적 지주로
<백의정승(白衣政承, 재야의 영의정)>으로 불렸던 유대치가
의사였던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치는 전염병과 기근에 고통받는
조선 후기 민중들을 바라본 양심적인 지식인이었고,
불교라는 자비의 사상과 개화를 통한 근대화된 세상을 꿈꾸며
개화당 청년들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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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당의 주동자중 한 명인 서광범 >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이
다른 시대 사람의 삶의 고뇌를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시대적 배경과
그 사람의 성장 배경, 그가 가졌던 고뇌 등을 사려깊게 판단하여
여기에 대해 자기 나름의 주관을 갖고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년 개화당을 지도했던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의 3인방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조선 후기에서 불자로서는 유일무이하게 현실 사회 속에서 역사에 등장하여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의 신념과 꿈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개화당은 꿈을 가진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움직였습니다.
 
개화당을 단순히 일본의 힘을 빌어
개화를 추진해서 무모하게 쿠테타를 일으켜
실패한 풋내기 젊은이들의 집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당시 시대를 살면서 어떤 삶의 고뇌를 가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시대의 문제로 무엇을 보고 느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돌아보며,
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정신에 맞게 여법하게 사고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시대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시대의 아픔에 공감해야 하고,
그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여 했던 그들의 의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불교적 방편이었는지도 깊이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분제가 붕괴되며 새로운 사회 질서가 태동되던 시대.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전근대적 석양이 마지막 빛을 발하던 시대.

가난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던 시대.
 
그 시대를 살면서 불교적 가치관을 가졌던

의사 유홍기, 역관 오경석, 스님 이동인이 바라본 조선의 문제와

그 문제의 처방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사려깊게 살펴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