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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4. 개항기 한국 불교 동향(1) - 개항기 일본 불교의 침투

by 아미타온 2025. 11. 22.

4. 개항기 한국 불교 동향(1) - 개항기 일본 불교의 침투

 

<교토역 입구에 있는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 총본산 동본원사>

 

조선 시대 불교는 억불 정책 속에

신음하던 암흑기였습니다.

 

승려의 인권이 무시된 채 갖가지 핍박을 당하며

근근이 여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불교를 가리켜

‘타성적 수난의 시대'이니

‘종승(宗乘)도 종통도 없는 시대’라는 혹평을 합니다.

불교 위상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불교가 이처럼 참담한 상황에 있을 때

‘개항’(1876)과 함께 일본 세력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외교 내지 군사력을 주축으로 하는 침략이었습니다.

 

일제의 침략과 함께 일본 불교도들도

조선에 들어와 포교소를 세우고 종교 활동을 시작합니다.

 

일본 불교의 한국 진출 이면에는 단순한 종교적 포교 외에

여러가지 정치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개화기 이후 일제의 침탈과 일본 불교의 진출 속에서

한국 불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떤 반응과 현실 인식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번 시간부터 일본 제국주의에서 시작됝

개화기 불교의 현실 인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교토 천황 거처인 교토 고쇼>

 

(1)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 불교의 동향

 

일본은 6세기경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후

불교를 신봉하여 국교의 지위로 대우했습니다.

 

19세기 중엽 일본은 300년 에도 막부 봉건 체제를 청산하고

메이지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제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양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변혁 과정을 '메이지 유신'이라고 합니다.

 

이 때 종교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 종교의 주류는 불교였습니다.

 

일본의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는 종속적 위치에서

불교와 공존을 추구하며 오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일본 교토 우지의 세계문화유산, 우지가미 신사>

 

신도의 기원은 일본인들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제사 의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사용되는 가미(신)의 개념은 자연신과 인간신을 총칭한 것입니다.

 

신도는 고대인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 신앙 형태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1868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중앙 집권제의 사상적 지주로

일본 고유의 토착 신앙인 신도를 부활시켰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도를 불교로부터 분리시켜 국교화하기 위한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이 공표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종속적 위치였던 신도의 복원과 함께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전개되었습니다.

 

폐불훼석이 전개된 것은 불교가 기존 에도 봉건 막부 체제와

유착되어 어용화되었고 타락한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정부 이전에 불교는 막부의 지원을 받아

국민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 막부의 통치 기반인 불교계를 억압하면서

국민의 새로운 정신적 지주로 신도를 복원코자 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10엔 후면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교토 우지 보됴인(평등원)>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천황제 국가가 성립하자

유학자들과 복고 국학자들은 배불론을 주장했고 법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대대로 산사에서 의식을 집전하던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각종 불구(佛具)를 폐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후지야마 번(富山藩) 지역에서는

번주가 '한 종파에 한 사찰만 유지하라."고 지시하여

총 1,600여개의 사찰 중에 7개만 남기고 폐쇄하는 가공할만한 조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불교에 대한 탄압은 일반적이었습니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대처와 육식을 자유화하는 포교를 내려

일본 불교의 세속화를 심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정권은 불교계를 쉽게 통제하였고,

불교계를 이때까지 없던 미증류의 혼란 상태로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정권의 탄압 속에 급속히 세력이 위축되어 

산중으로 쫓겨간 한국 불교와는 달리 일본 불교계는 달랐습니다.

 

생존을 위해 정권에 밀착하고 정책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국가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띤 불교로 부활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불교 지도자들은 불교 탄압 사태에 직면하여

구미 각국을 방문하여 종교 제도와 문물을 연구해 오고,

'신불병존(神佛倂存)'을 주장하면서 교단의 내정을 정비했고

종문의 여러 교육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호국론과 결합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교론(邪敎論)'과 반국가성을 지적함으로서

반기독교 사상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불교계는 '왕법'과 '불법'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며

불교가 결코 정부와 국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앞세웠습니다.

이렇게 일본 신정부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북해도(北海道) 개척에 나섰고,

중국과 조선 등에 해외 포교를 전개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정부는

신불분리를 단행하면서 신도에 대한 보급을 강화했지만,

신도에 의한 교화가 교리상 한계로 문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불교에 대한 통제와 불교인들의 정부에 대한 협력으로

다시 불교를 일본 정치의 한쪽 날개로 동원하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내정을 개혁한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본은 오랫동안 한반도를 통해 대륙의 선진 문명을 접해오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산업 문명을 받아들인 뒤

국력이 커지게 되자 반대로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아

오랫동안 꿈꾸던 대륙 진출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1876년 2월,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 틈에 일본 정부는 조선의 개항지를

침략의 전초 기지로 만들기 위해 각종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일본 불교계에 조선에 대한 개교를 권유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교토 정토진종 총본산 동본원사 어영당>

 

 

개항직후 1877년 일본 내부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외무상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는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本願寺) 관장인 겐뇨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개교를 종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이 정토진종계의 한 문파인 대곡파(大谷派) 본원사에

조선 포교를 먼저 권유한 이유는 정토진종이 일본 최대 문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58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오촌정신(奧村淨信)이 부산에 고덕사를 세운 전통이 있고,

조선 사신이 통신사로 일본에 오면 도쿄 본원사에 묵었던 관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정부측 당국자들로부터 종용을 받은 겐뇨는

1877년 8월 오쿠무라 엔싱과 히라노 게이스이를 조선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일본 본원사에 남겨져 있는 자료는

당시의 조선 포교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원사(本願寺)는

‘종교는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말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메이지(明治) 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성한 뒤부터

점차 중국·조선에 향하여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또한 북해도(北海道)의 개척을 비롯하여

중국·조선의 개교를 계획하였다.

 

메이지 10년(1877) 내무경 대구보(大久保) 씨는 외무경 사도(寺島) 씨와 함께

본원사 관장 겐뇨 상인(嚴如上人)에게 ‘조선개교에 관한 일’을 종용 의뢰하였다. 

 

이에 본원사에서는 곧 제1차 개교에 공로가 있는

오촌원심(奧村圓心)과 평야혜수(平野惠粹) 두 사람을 발탁,

조선에 파견하고 부산에 별원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정토진종 대곡파 본산 교토 동본원사>

 

2. 개항기 일본 불교 세력의 침투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의 일원으로

조선에 건너온 두 승려 중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이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오촌가의 후손 오쿠무라 엔싱은

당시 일본 나가사키현 고덕사의 주지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부산으로 건너와 고덕사라는 절을 세우고

일본군에 종군했던 선조인 오촌정신(奧村淨信)의 14대손이었습니다.

 

고덕사는 오촌정신이 본래 부산에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길이 막히자 일본 나가사키현에 다시 재건한 것입니다.

 

일본은 가업을 대대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스님도 사찰 주지도 대를 이어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토진종 대곡파는 고덕사 주지를 계속 세습한

오쿠무라 엔싱을 조선 포교의 적임자로 뽑았던 것입니다.

 

그는 여동생과 함께 조선으로 와서

부산에 본원사 별원을 세우고 포교했습니다.

 

그녀의 여동생은 나중에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의 비서 역할을 하였고,

청일.러일 전쟁에도 종군하였으며 후일 일본 애국부인회의 창설자이기도 합니다.

 

오쿠무라 엔싱은 1880년 마에다 총영사로부터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적대 기운을 완화시킬수 있는

역할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마에다 총영사는 불교의 포교 활동이

조선 민중의 대일 감정을 낮추는데

크게 공헌한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본원사가 조선 포교에 진력할 수 있는 취지를 담은 칙령을 내리도록

일본의 우대신(右大臣)인 이와쿠라 토오미(巖倉具視)에게 부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쿠무라 엔싱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요?

 

먼저 착수한 일은 조선인 내지 조선 불교인들을  유인, 포섭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되도록 완화시키기 위한 방략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신기한 개화 물품인

'남포(램프)'니 '석유'니 '사진기'나,

내복, 과자, 약품 등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선물을 하는 등 여러 모로 선심을 쓰며 포교를 했습니다.  

 

이들 오누이는 조선에 불교(정토진종)를 포교만 한 것이 아니라,

이동인, 탁몽성, 유대치 등 개화당의 일본행을 주선하는 등

개화파와 일본의 막후 교량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동인이 유학한 교토 동본원사>

 

 

후일 개화기에 활동을 한 이동인은 일본 유학 중

다음과 같이 오쿠무라 엔싱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소생(이동인)은 본산(本山, 교토 본원사)에

도착한 뒤로는 잘 먹고 따뜻이 자며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법주(大法主,오쿠무라 엔싱)의 넓으신 은혜 이렇듯이 높고 후하시니,

장차 어찌 그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위 어학(語學, 곧 일본말) 공부는

아득하고 멍멍하여 분간을 할 수가 없으니,

어느 때나 귀가 뚫리고 입이 터져 보고 듣고

말을 할 수가 있을른지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가등사(加藤師)께서도 평안하시며

다른 도반(道伴)들도 잘들 지내시는지,

여러분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하루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이처럼 그는 조선인의 환심을 사고

똑똑한 승려나 불교인의 유학을 주선하며 

후일 친일적인 인물을 양성하려 하였습니다.

 

오쿠무라 엔싱은 후일 <조선국 포교일지>를 남겼습니다.

 

여기에 이동인,탁몽성,유대치 등 개화당과 접촉사항을

날짜순으로 기록해 오늘날 개화당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통과 실력을 갖춘 오쿠무라 엔싱은

1877년 부산에 정토진종 대곡파 부산포교소를 세웠고,

이후 정토진종 대곡파는 1906년까지 원산,인천,서울 등

12개 도시에 포교소를 꾸준히 건립해 나갔습니다.

 

대곡파의 뒤를 이어 이어 1881년에는

일련종의 와타나베 치아응이 부산에 건너와 일종회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일련종은 니치렌이 창종한 종파로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경전의 이름을 외는 '남묘호랑게교'라고도 합니다.

 

<일본 저토종 사찰 교토 영관당>

 

 

이후 1890년 교토 일련종 묘각사의 주지 아사히 미츠가

부산으로 건너와서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련종 해외 선교단을 조직했습니다.

 

일련종 해외 선교단은 본부를 서울 묘각사에 두고

각 지부를 설치하여 포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1894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성격이 달라집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 침략을 더욱 노골화하고 침략의 강도가 강해집니다.

 

이미 조선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대곡파 동본원사와 일련종 이외에 

정토종과 정토진종 본파 서본원사도 가세하였습니다.

 

1897년에는 정토종의 미쓰미다 모찌몽이 부산에 상륙하여 포교를 시작한 이래

1898년에 경성에 개교원을 설치하고 인천,개성,평양,마산 등지로 세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곡파 본원사,본파 본원사,정토종,일련종 등의 여러 종파들이

더욱 열심히 침투 노력을 경주하고 새롭게 조동종,임제종,진언종 등이 조선 포교에 참여하였습니다.

 

사찰령이 공포되는 1911년까지 조선에 상륙한 일본 불교종파는

당시 12개 종단 49개 종파 중 6개 종단 11개 종파에 달했습니다.

 

조선에 상륙하지 않은 나머지 6개 종단은

신도수가 100만이 안 되거나 겨우 100만이 넘는 군소종단이었습니다.

 

즉, 당시 일본 불교 유력 종단은 대부분 조선에 포교소나 별원을 세운 것입니다.

 

<일본 교토 동본원사>

 

한편, 1907년 종단을 알 수 없는 어느 일본 승려가

1906년 8월부터 조선 불교의 형세를 본국의 교계나 정치가들에게

참고 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쓴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조선 불교계의 형편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사찰은 일본과는 달리 깊은 산 속에 있어 찾아다니기가 불편하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어떤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불전에는 비가 새거나 전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석가모니 불상이 있다.

 

쥐의 배설물로 더러워진 서너권의 경권이 있고,

승려들은 무학무식하여 속인과 구별하기 어렵고 애처럽기까지 하다.

사찰 앞에는 술을 팔고, 생선을 요리하는 음식점이 있다.

승려들은 처나 첩이 있는 경우도 있다.

 

여승들은 불구이거나 혹은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한 경우가 많았다.

친척들은 버린 자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의 찾지 않았다.

 

승려들은 종일 함께 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일생동안 한 가지 일을 성취해내는 사람도 없다.

조선의 승려들은 일본 승려들을 양반이라고 부르면서 비교적 신뢰하고 있다. " 

 

이 보고서를 보면 승려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승과의 면담 내용은 거의 없고

하류 승려들의 생활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당시 조선 불교계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고,

스님들의 수준이 일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 승려들은 종교의 포교나 종단의 교세 확산뿐 아니라

식민통치의 편의를 제공하고 제국주의적 침탈로부터

조선 민중을 위무하기 위한 수단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항 이후 일체의 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

일본 불교의 한국 진출도 더욱더 가속화되었던 것입니다. 

 

<일본 교토 진언종 사찰 동사(도지)>

 

3. 일본 불교 침투에 대한 조선 교계의 현실 인식

 

그렇다면 일제 및 일본 불교인들의 위와 같은 공작에 대해

당시 조선 불교 교단은 어떠한 인식을 하고 있었을까요?

 

문호 개방과 더불어 침략 세력과 함께 밀려오기 시작한

일본 불교인들의 목적은 순수 종교의 홍포 확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학란의 기치로서 "척양척왜"를 외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비하면

조선 스님들은 일본 불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교토 은각사 정원>

 

오쿠무라 엔싱이 지은 <조선 포교 일지>에 나타난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1877. 11. 4. …… 부산 거주 최모 씨와 반복 필담,

그의 신심 여부를 알아본즉 그는 금석같이 맹세를 하는지라,

불상과 염주를 주니 재배 돈수(頓首),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② 1878. 1. 3. 금강산 신계사 태묵당(太默堂) 내방.

 그는 한국불교의 쇠퇴를 개탄하면서 나의 도한(渡韓)을 만강의 성심으로 환영,

앞으로 한국불교 발전을 도와 불일증휘(佛日增輝)의 날이 있게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③ 1878. 6. 16. 일요일. 한국인들의 마을을 산보하다가

엿과 떡을 주니 마치 굶주렸던 호랑이와 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④ 1878. 8. 13. 양산 거주 김문헌 내방,

우리 종문(宗門=곧 정토진종)의 제자가 될 것을 논의함.

 

⑤ 1878. 8. 18. 칠불사 문정(文定) 내방,

교의(敎儀)를 담론하며 우리 종문에 귀할 것을 논의함.

 

⑥ 1878. 8. 30. 범어사승 내방.

한국 불교의 쇠퇴상 및 목하 승려의 행적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

승려는 오직 기도하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대답.

 

⑦ 1880. 7. 31. 길천인(吉川人) 내방,

국체(國體)의 쇠미를 개탄하다가 배불(拜佛)하고 갔다.

 또 승려 4인이 와서 법당 재건 모연문(募緣文)을 제시하므로 일금 3백 문(文)을 보냈다.

 

⑧ 1880. 8. 13. 경성 민성호(閔聖鎬) 내방 필담.

국가의 쇠퇴를 누누진담(縷縷陳談)하다가 어느새 동녘이 밝았다.

 

⑨ 1880. 11. 23. 묵암(默庵) 소승이 와서

명년 봄에 도일(渡日)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감.

 

⑩ 1881. 1. 9. 금강산 태묵(太默)이 묵암의

서신을 가져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 사람은 그 동안 많은 경서를 읽고 참선도 해봤습니다만 ……

 아직도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는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

 이제 바다 건너 귀국으로 가서 여러 종장(宗匠)들을 뵙고

지도를 받고자 하옵는바, 과연 허락을 해주실런지요.”

 

⑪ 1881. 5. 1. 민치복(閔致福)이 와서 말하기를

“진종(眞宗, 일본 정토종) 교법이 우리 나라에 홍통하게 되면

이는 곧 기독교 방어의 최상책이 될 것이온바……”라고 한다.

나는 이에 매우 감격하였다.

 

<일본 교토 도지>

 

위의 기사들 중 일부는 아전인수격 과장 내지

윤색된 부분도 더러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친일적인 인식과 동향이

당시 교단 내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편, 조선 시대 대표적 불교 차별 조치 중 하나인

'승려의 서울 4대문 내 입성 금지' 조치가 '사노'라는 

일본 일련종 스님의 주청이 계기가 되어 폐지됩니다.

 

‘서울 4대문 내 입성 해금’이 이루어진 직후인 1895년 4월,

상순(尙順)이란 법명의 용주사 주지가

일본 승려에게 보낸 감사장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천한 대접을 받아 온 나머지,

불입성문(不入城門)의 차별 대우가

실로 수백 년에 걸쳐 있었을 만큼

답답하고 억울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사노 존사(尊師)께서 오시어

5백 년래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시니,

그 감사하고 경하스러운 말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일본의 침탈이 가속화되고

일본 불교의 조선 상륙이 더욱 심화됨에 따라

조선 불교가 일본에 종속화되는 현상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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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은각사>

 

조선 불교는 오랫동안 억압과 침탈 속에

그 위상이 추락해 있던 암흑기였습니다.

 

5백년간 모멸과 냉대 속에

불교의 생기를 거의 잃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문호 개방’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세력은 한국을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정치·군사적 힘을 앞세우고 들어왔지만,

일본 불교인들이 침략의 선도 역할을 하며 밀려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개항기 조선에 와서 한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 내의 자국민 포교'와 '일본 불교의 해외 홍포'라는

종교 선교적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침략 세력의 앞잡이로서의 역할―

조선의 악화된 민심을 완화·절충시키는 역할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일본 제국 주의자들은 지금은 비록 쇠퇴했지만,

한국이 전통적인 불교 국가라는 점에 착안했을 것입니다. 

 

불교를 통해 조선에 접근하고

친일적인 조선인을 양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유력한 공작 대상이

되었던 것이 한국 불교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한국 불교는 일본불교와 접촉이 시작되는데,

그들은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한국인의 민심을

일본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었습니다.

 

램프와 석유 등 서구 물품을 들고 와서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도성출입’ 금지에 관한 악법을 해제시켜 주거나

똑똑한 조선 불교인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면서 한국 불교인에게 접근해나갔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한국 불교인들은 일본 불교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한편에서는 일본 불교를 구세주처럼 인식하는 풍조조차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 시대 억불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기도 했으나,

당시 한국 불교는 정치적인 의식이나 주체성 없이 방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기 전인 개항기에 한국 불교의 친일성이

일본 침략이 본격화되고 식민지화 이후에는 일제에 협조적 형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