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한국 불교의 동향(3) - 원흥사의 창건과 사서관리서>

19세기말 개항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강압적 개방의 결과로
유교 지배 이념 붕괴와 통치력이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서양 선교사와 일본 각 종파의 포교사가 앞다투어 건너와
왕성한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고종이 등용한 개화파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면서
불교계에 대해 예전에 비해 관용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수백년간 유지해온 억불 정책을
승려 입성 해제로 유화적으로 전환한 조선 정부는
사찰과 승려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시 불교계는 승풍이 극도로 쇠퇴하고
스님들은 산사에서 간신히 절을 지키고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세를 등에 업은 선교사들이
맹렬히 선교 활동을 펼치고
일본의 불교 각 종파도 급속히 확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위기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방치해 왔던 불교계 관리를
국가의 통제 하인 제도권 내로 편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전국 사찰을 총괄할 수 있는 수(首) 사찰(으뜸 사찰)로서
서울 인근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설치하였습니다.
원흥사 내에 궁내부(宮內部) 소속으로
'사서관리서(寺署管理署)'를 설치하고,
<국내 사찰 관리 현행 세칙>이란 법규를 제정하여
국가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승려 서울 도성 입성 해제 이후
조선 정부에서 불교계를 어떻게 관리하려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원흥사의 창건과 사서관리서의 설치
1901년(광무 5년) 고종은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원흥사를 창건한 것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새롭게 중전이 된 엄비(영친왕의 모후)의 불심도 작용했지만,
서울에 큰 절을 세워 불교계 관리를
제도권 하에 추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원흥사는 지금의 동대문 밖 창신동 창신 초등학교 자리에 세웠으며,
당시 예산으로 20만냥이 소요된 대규모 공사였습니다.
원흥사 창건을 위해 조정은 전국 사찰에 동원령을 내려
스님들을 동원하고 아름들이 나무를 베어 대대적인 규모로 건축했습니다.
대법당과 그 동북전에 노전, 시왕전, 영산전을 짓고,
수백칸의 요사채와 합치면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습니다.
원흥사 창건의 총책임자로 관리서 책임자로
육군 참령 출신의 권종석을 임명하고,
불교계 인사로는 월정사의 홍보룡 스님이 경리 책임을 맡고,
이해성 스님에게 부전을 맡겼습니다.
드디어 1902년 1월 4일 오후 원흥사 개원 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일본 정토종 한국 대표가 참석하고 남긴 기록에 의하면
이 법회에는 <사서관리서> 책임자인 당상 권종석과
중추원 의관 조병득, 그리고 도섭리로 임명된 순일 스님을 비롯해
500여명의 승려와 300여 재가 신도, 그리고 황실의 상궁과 대신들도 참석하여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법회의 분위기는 황실에서 서울에 절을 세워
불교를 진흥하게 한데 대한 감사와 경축의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환영 분위기와는 달리
기록자인 일본 정토종 승려는 조선 불교를 복원시켜
일본 불교의 확산을 막으려는 조선 정부의 의도에서
원흥사를 창건한 것 같다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비록 도성 밖이나마 원흥사가 창건되어 가람의 위용을 갖추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1902년 4월, 고종은 관제를 개혁하면서 궁내부 산하에
'국내 산림, 성보(聖寶), 사찰에 대한 일체 사무를 관리'할
'사서관리서(寺署管理署)'를 증설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그 사서관리서의 사무를 원흥사 내에서 보게 하였습니다.
관리서에는 관리 1인, 부관 1인, 이사 3인, 주사 6인 등
모두 11명의 공무원을 두고 사찰 일체 관리를 지휘 감독하게 했습니다.
서서관리서는 국내의 사찰뿐 아니라 산림과 성곽을 관장했지만,
사찰이 위치한 산에 산림이 많았고 산성도 승려들이 보수 유지를 맡았기 때문에
관리서의 주된 임무는 주로 사찰과 승려들의 관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902년 7월, 사서관리서는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이란
법규를 제정하여 전국 사찰에 배포했습니다.
세칙은 모두 36개조로 구성되어 있고,
전국 사찰과 승려 관리 방안이 체계적으로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정이 원흥사를 두어
불교를 총괄하는 본산으로 삼고자 했던데서 더 나아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관리하는 법령을 만들어
시행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조치였습니다.
국가적 법적 테두리 밖에서 조선 왕조의 탄압을 받으며
민간에서 겨우 생명력을 부지해왔던 불교로서는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비록 국가가 불교를 통제하려는 의도 하에 출발하였지만,
일단 제도권 내에 불교를 편입시킨데 대해
조정이 도성 입성 금지 해제 조치와 함께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의 제정은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2)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의 내용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을 제정하게 된 취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승도들의 무리에 대해서 일찌기 규제하는 법령이 없었다.
우리 국조 5백년에 미쳐 성인(공맹)의 감화와 다스림이 크게 행해졌음에도
불교는 그 혜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래서 승도의 백폐(百廢)가 생겨나고
승려들은 어리석어 불도를 돌보지 아니하고 산을 팔고 땅을 엿보아
절은 쇠잔해지고 암자는 없어졌으니 이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무리라고 해서 어찌 교화해야 할 백성이 아니며
쇠잔하는 사찰과 흩어지는 승려를 방치할 수 있겠는가.
이에 관리서를 세워 모든 도의 각 사찰을 총괄하게 하고
피폐해진 사찰을 조사하여 보존하고
승려의 무리들을 바로잡아 감화하고자 하니
성인(공맹)의 은택이 진실로 깊지 아니한가.... "
다음은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의 주요한 조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조는 "블교의 목적은 돈(頓),점(漸),비밀(秘密).부정(不定).
장(藏).통(通).별(別).원(圓).인교(人敎)의 수기문(隨機門)을 선양하여
견성 성불의 진리를 개시(開示)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조문은 불교의 본래의 목적을 밝히고 이에 충실하라는 원칙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2조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부모에 효도 공양하고
제왕에게 충성을 하며 오역중죄를 짓지 말라는 법어를
종칙으로 삼아 이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펼치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유교적 지배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 말고,
국가에 위해되는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조는 "사찰의 법회는 불교 관계에만 한정하고,
정치나 정계의 득실에 대한 발언은 엄금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은 대한제국의 부조리와 부패상황에 대해
불교계가 비판마저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전근대적인 조항이었습니다.
제4조와 5조는 법계(法階)와 그에 따른 법의(法衣)의 색깔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6조는 대법산과 중법산을 설치하고 국내 사찰의 서열을 규정하였습니다.
대법산은 국내 으뜸 사찰이니 서울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수사찰이니 그 위치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중법산은 경기좌도 광주 봉은사/ 경기우도 양주 봉선사/
경기남도 수원 용주사/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전라남도 순천 송광사/
전라북도 김제 금산사/경상우도 합천 해인사/
경상좌도 대구 동화사/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강원남도 강릉 월정사/강원북도 고성 유점사/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함경북도 함흥 귀주사/
평안도 영변 보현사/황해도 해주 신광사 의 16개 사찰로 정해,
대법산-중법산-말사의 일원적 관리 체계를 명시하였습니다.
제7조부터 18조까지는 국내 수사찰(원흥사 및 중법산)의
승직명,인원,법계,선출방식,임기,임무 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수사찰인 원흥사에는 다음과 같은 법계를 두게 하였습니다.
좌교정(左敎正)은 제1급1등 법계로서 오늘날의 종정과 같은 위치로서
도덕,학술,품행과 법랍을 겸비한 자를 공선하여
수사찰인 원흥사의 임원과 사원의 사무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우교정(右敎正)은 제1급2등 법계로서 좌교정을 보좌하고
좌교정 유고시에 그 사무를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대선의(大禪議)는 법계와 수행. 포상. 징계를 맡는 소임,
상강의(上講議)는 승려 교육과 도첩,이력 등을 맡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제2급1등 품계지만 도섭리(都攝理)가
지금의 총무원장처럼 전국 사찰의 신축,중수 등의 재산 관리,
승려 규찰의 실질적인 대소사를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원,서기,지빈 등의 실무진이 대섭리를 보좌하여
실무를 담당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각 도내 수사찰인 중법산에도
도교정(道敎正)을 비롯한 8인의 임원을 두되
일체의 사무를 대법산의 명령을 받아 도내 사찰을 지휘 감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기타 하위 각 사찰에는 주지 1인 등 4인을 두되
형편에 따라 증감할 수 있도록 하고
일체 사무는 중법산의 지휘를 받게 하였습니다.
한편, 이러한 승직을 소임에 따라 분배하고
국가가 임명하지 않고 승단에서 선거(공선)에 의해 선출하게 하여
어느 정도 불교계의 자율권을 보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산-중법산-사찰의 관리 체계를
철저히 중앙집권적 방식을 통하며 관리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제19조는 죄교정 이하 중법산인 16개 수사찰 임원의 첩지는
사서관리소에서 발급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임원 승려의 도첩을 관리서에서 발급한다고 규정하여
정부가 불교계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제20조는 전체 임원의 임기는 12개월로 정하고 있습니다.
임원이 임기 중에 죄과를 범했을 때에는
잔여 임기에 상관없이 면직될 수 있었으며,
임기 중에 공적이 있는 자는 한 번에 걸쳐 재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제21조와 22조는 승단의 임원들은 사원과 승려에 관한 사무만 관장하고,
행정상의 행위는 관리서의 지휘 감독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 규정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승적을 박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대법산과 중법산은 사찰 및 승려 사무만 맡고,
행정적인 조치는 서사관리소의 지휘 감독을 받게 하여
사서관리서 관료들이 행정 사무를 통제해
자율적인 교단보다는 국가적인 관리 체계를 제도화시켰음을 알수 있습니다.
제23조는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도첩을 받은 후에 삭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 24조는 거짓 승려의 종적을 엄금할 것과
도첩이 없는 자는 환속시킬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모든 승려는 매년 2냥씩을 봄.가을로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를 내지 않는 무승적자는 즉시 환속시킬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단서 조항으로 도첩은 사서관리소에서 발급하되
도첩을 발급받기 위해 2냥의 돈을 본사에 납부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승려가 되고 승려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액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것으로
불교계를 제약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25조는 사원의 규모와 탑 그리고 부도와 같은 재산 사항은
사실에 따라 문서로 만들어 보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찰은 관리 대상인 전답,산림 등의 자산과
불상,탑,부도 등의 문화재 유물 목록을 3부를 만들어서
1부는 사찰에 비치하고, 1부는 도내 중법산에 제출하고,
1부는 사서관리서에 제출하게 하였습니다.
이 조항은 절 재산을 불교 교단이 함부로 유용하거나,
투매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출 기한을 정하거나 제출하지 않았을 때
처벌 규정은 명시되지 않아 큰 효력을 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제26조는 사찰 소유의 유물과 전답을 잘 지켜나가되
임원의 임기가 만료되어 인계할 때 파손이나 잃어버린 것은
임원이 원상복구 비용을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문도 납부하지 않았을 시에 별다른 처벌 규정은 없었습니다.
제28조는 일반 승려가 현행법을 위반한 경우에
경미한 사안은 승단이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위임하였고
현행법을 위반한 사항 중에 사안이 중대한 것은
사서관리서에 보고하여 지시를 기다려 처벌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제29조는 사찰 형편에 따라 학교를 설립하고
승려 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 교수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이 조항은 불교계 인재 양성을 자체 내에서 도모하고,
발전을 지향하도록 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제30조는 일반 사원의 제반 잡역과
외부인에게 공역을 행하는 것을 혁파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관리 및 양반들이 절에 와서 잡역을 시키거나
스님들을 함부로 부리거나 하는 행위에 응하지 말라는 것이이었습니다.
이 조항은 조선 시대 불교계가 정부, 양반, 관인들에게 당했던
모든 수탈과 잡역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띠라서 불교계가 기타 종교 단체와 같은 조건에서 포교를 비롯한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법조항이었습니다.
제31조부터 35조까지는 승려들의 행장에 관한 것,
권선을 가급적 행하지 말라는 것,
본 세칙을 각사에 분급하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제36조는 <국내 사찰 현행 세칙>에 명시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리서의 판정을 기다려 시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의 시행으로
승려의 신분은 국법으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교계의 수장인 좌교정을 비롯한 임원을
승단에서 자체적으로 선출하게 되었다는 점,
승려들의 경미한 범죄 사안에 대해서는
승단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
그리고, 승단 자체에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
특히, 종래의 과도한 제반 잡역에서 해방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불교계의 자주적인 발전을 장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1908년 '원종(圓宗)'이라는 종단을 설립하였고,
명진 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은
국가가 중앙집권적으로 불교계를 관리하려고 했던 점과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발언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점,
도첩의 발급을 사서관리소에서 하고 매년 2냥씩의 세금을 납부하도록 한 점
등은 불교계를 매우 제약하는 요소였습니다.

(3) 사서관리서의 폐지와 사찰 관리 체계의 약화
이 사찰 세칙의 제정으로 조선불교계의 사찰과 스님은
이제 국가 차원의 관리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이후에 본래적인 교단 운영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관리 체계였지만,
불교를 제도권 내에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조 수백년간 억압받던 스님들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로 비추어졌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수사찰인 원흥사에서는 자주 성대한 재와 법회를 열어
멸시받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준 황실에 대한
극진한 정성으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목 : 산사경축 (1903년 9월 17일자/ 황성신문>
어제 동문밖 원흥사에서 왕상 폐하의 위축 전각과
명성황후 원당과 법당을 새롭게 지어 준공한지라
서울 인근 모든 절의 승려가 재를 행하여
연일 재계하고 설법과 독경을 행하는데
선비와 부녀자가 구름같더라.
그러나, 조선 왕조가 불교 정책의 전환점으로 마련한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이란 법령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먼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대한제국의 통치력은 약화되어 제대로 시행이 되지를 못했으며
구한말 정부가 불교를 관리하고자 하는 의지 부족과 관리 능력의 해이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각과 궁내부 간의 알력의 희생양으로
'사서관리서'가 할일 없는 부서로 인식되었습니다.
사찰 관리를 맡은 사서관리서는
내각 소속의 내부(內部) 소속이 아니라
황실 재산과 황족들을 관리하는 궁내부(宮內府) 소속이었고,
그 중에서도 황제의 경호를 담당하던 경위원(警衛院) 소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서관리소가 불교의 발전과 불교 관리의 효율성보다는
사찰과 관련된 재산을 황실 재산으로 만들고
재원 유지를 확보하기 위한 황실 측근들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된 측면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점이 내각의 실세인 내부(內部)에서 보기에는
쓸데없고 할일없는 부서로 인식이 되었고,
결국 내각과 궁내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재정부족을 이유로 내각에서 예산 편성시 경비 지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범한지 2년만인 1904년에 원흥사 내의 사서관리서가 폐지되고
사서관리서 업무가 내각인 내부 지방국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 사찰 현행 세칙>도 흐지부지되어 버렸습니다.
한편, 원흥사는 국내 사찰을 총괄하는 으뜸 사찰로서의 위상보다
황실을 위한 기복 사찰로서 기능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또한, 불교가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오면서
스님들이 교단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풍조가 없었습니다.
스님들은 교단 중심의 운영보다는
자기 절이나 문중을 중심으로 하여 결집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리하여 국내 사찰 현행 세칙에 의거하여
도내 수사찰 16군데를 지정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빠진 기타 유력 사찰들은 중법산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서로 다투면서 중법산 승격 운동을 벌였습니다.
특히, 경북 동화사 옆의 은해사, 경남 통도사 옆의 범어사,
전남 송광사 옆의 선암사, 강원 유점사 옆의 건봉사 등의 4개 사찰은
도내 수사찰로 승격된 절과 은연중 경쟁관계였는데,
중법산 지정에서 빠지자 승격 운동을 벌였습니다.
원흥사 소임자들은 이에 이들 사찰들의 청탁을 들어주기 시작하여
4개 사찰을 중법산으로 승격시켰고,
나중에 의성 고운사 등의 10개 사찰을 더 승격시켜
도내 수사찰의 수는 총 30개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시적으로 시행된 불교계의 자율적인 운영체계 아래
갑작스럽게 늘어난 30개에 달하는 본산은
1911년 일제 시대 때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사찰령의 '30본산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교계 내에서도 교단 중심의 중앙집권적 운영에 대한 반발로
이 제도가 위력을 발휘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구한말 사서관리서를 설치하여
국가가 불교를 관리하려고 하였던 마지막 시도는 실패하였습니다.
구한말 일본에 의해 국권을 점차 잃어가면서
국가 통치력의 상실과 함께 이에 따른 관리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중앙집권적 교단 운영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 등으로
실시된지 2년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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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으로 기독교의 교세는 확장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포교뿐만 아니라
병을 치료하는 병원 설립과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 운영 등의
사업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1906년 기독교의 한 교파인 장로교는
교회당수 546개, 교인수가 5만 6천 명이었으며,
병원 6개를 포함하여 대학 1, 고등학교3, 소학교 399개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나 교인수에 비해 학교와 병원에
상당한 노력과 투자를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계가 선교를 위해 교육 사업에 주력한 결과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독립협회의 창립으로 시작되는
근대적 시민운동(애국 계몽 운동)에는 기독교계의 교사와 학생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등이 대표적인 기독교계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여러차례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자주 국권 운동과
자유 민권 운동을 펼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의회 중심의 개혁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던 독립협회파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주국을 원한 정부와는 사이가 멀어지게 되고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을 당하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은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도 이들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
발전한 기독교계의 힘과 근대적 사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서
신흥종교였던 동학의 강한 결집을 보고
강한 혁명성과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를 보면서
종교의 힘에 대해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아울러 일본을 통해 차츰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본 불교의 모습을 보면서 불교계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조 내내 억불 정책으로 일관하며
불교계를 탄압 내지 소외시켰던 정부도 불교계에 대해 유화책을 쓰며
제도권 내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서울 도성 근처에 원흥사를 세워 한국 불교의 총본산으로 삼고
사서관리서와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이란 법규를 만들어
불교계를 국가에서 관리하려고 하였습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계에 대해
엄청난 은혜를 베푼다는 뉘앙스의 서문을 보거나
총법산-중법산-말사적인 체계와 사서관리서의 관리를 통해
중앙집권적으로 사찰과 승려들을 관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이 되거나 승려직을 유지하려면
국가에 두냥씩 세금을 내게 하였던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국가의 종교 통제라는 점에서 말도 안 되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수백년간 인권을 무시당하며
엄청난 탄압 속에서 살아온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와 스님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조선 후기 여러가지 공납과 수탈의 폐해를 법적으로 금지한 점,
스님들의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권장하고 있는 점 등에서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유화적인 조치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탈로 인한 통치력의 약화,
당시의 궁내부와 내부간의 알력,
감사의 재나 올리는 등 근대화되지 못한 스님들의 의식 부족,
근대적 교단 체계를 만들어나갈 불교 지도층의 부재 등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구한말에 조성되기 시작한
불교의 자주적 근대화의 시기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한국불교는 점점 일본 불교계의 영향력 하에서
체제순응적인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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