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항기 한국 불교 동향(2) -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 해제

조선 시대 불교 탄압의 상징적 조치가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였습니다.
스님들의 서울 도성(사대문 내) 출입을 금하는
'승려의 서울 입승 금지' 조치는
조선조 억불 정책 속의 스님 인권 유린의 대표적 사례였던 것입니다.
개화와 동학 혁명을 통해 터져나온
평등과 근대화의 사회 풍조 속에 해제가 논의되었으나,
한 일본 승려의 주청이 계기가 되어 공식적으로 폐지가 됩니다.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 조치 해제로
이후 불교계의 활동은 많이 활성화되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불교가
친일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는 부정적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가 풀리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당시 승려들의 현실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일본 승려의 주청에 의한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 해제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 조치는
1451년 조선 5대 문종 때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그 이후 명종 때 문정 왕후에 의한 불교 중흥책과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활약으로 잠시 완화되었다가
1623년 인조가 금지령을 강화하여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는 조선 왕조에서
유교적 통치에 방해가 되는 불교 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시행된 조치였습니다.
조선시대 때의 법률집인 <속대전>에 보면
"승려로서 함부로 도성 안에 들어가는 일을 금지하며,
이를 어긴 자는 곤장 100대에 영구히 잔읍 노비로 충당한다."
라고 규정하고 매우 중형으로 엄격하게 시행되었습니다.
소와 개와 같은 짐승들도 도성 출입이 가능하였는데,
승려만을 수백년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승려를 "문외한(門外漢)"으로 소외시킨 조치는
승려의 인권과 불교의 존엄성을 훼손한 대표적 조치였습니다.
4백년간 존속되던 승려의 입성 금지 폐지가 처음 논의된 것은
1894년 동학 혁명으로 강력한 개혁 요구가 분출된 이후였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군국기무처'를 설립하고
오늘날 '갑오경장'이라고 불리는 개혁을 추진했을 때였습니다.
1876년 문호가 개방되자 조선 왕조는 외세와 함께 들어온
천주교, 기독교의 포교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후기 탄압을 받았던 천주교는
1886년 조선-프랑스의 수호통상조약에서
프랑스 인은 자신의 신앙을 믿을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하였으며,
조선인에 대한 천주교 포교의 자유도 용인되었습니다.
개신교(기독교)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벌였고
1887년 서울에 새문안교회가 설립됨으로서
조선 왕조로부터 선교 활동을 묵인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연히 불교 승려 입성을
금지시킨 조치가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4년 7월에 설립된 군국기무처가 국정개혁을 위해
18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이 '승려의 도성출입 해금'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법을 제정하였다
(1) 각국에 전권 사신을 파견하여 자주 독립을 포고한다.
.....
(4) 문벌과 양반 상놈의 격식을 없앤다.
..
.(13) 승려의 도성 출입을 폐지한다....
그러나, 당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친했던 명성 황후 대신 대원군을 정치 일선에 배치하였습니다.
대원군은 군국 기무처의 개혁안이 민심의 동요를 가져온다면서
개혁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며 방해해서 실제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개혁에 미온적인 대원군을 은퇴시키고,
갑신정변으로 망명했던 박영효,서광범의 복권을 지원하였습니다.
고종은 1894년 10월 내각 개편을 단행하여
총리에 김홍집을 유임하고,
박영효를 내무대신,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중용했습니다.
강력한 개화파 내각을 임명한 고종은
1895년 1월 '홍범14조'를 공포하며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나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895년 3월,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佐野前勵)가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빌어
승려의 도성 금지에 관한 견백서를 김홍집 총리에게 올렸습니다.
일본 승려는 자유 자재로 남의 나라(조선) 서울을 출입하는데 반해,
조선의 승려는 자기 나라 서울에 출입을 못하는 상황에 대해
이를 풀어줌이 좋겠다는 것이 견백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조선 불교에 가장 치명적인 법령 중 하나인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시키는데 착안하여
이를 기회로 일본 불교를 용이하게 침투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당시의 상황을 다카하시(高橋亨)가
그의 저서 <이조 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노(일본승려)는 경성(서울)에 머무른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 불교는 이미 생기를 잃고
조선 승려에게는 종승도 없으며
종지의 신조도 없음을 간파하고,
방편을 잘 쓴다면 그들을 일본 불교 종지에 개종시키고,
나아가서는 일련종을 가지고 조선 불교계를 통일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에 사노는 조선 승려를 위해
파천황(破天荒)의 은혜를 베풀어주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을
일련종으로 끌어들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기재(奇才) 사노가 착안한 것은
실로 조선 승려 서울 입성 해금 문제였다."
한편, 사노의 견백서를 받은 김홍집은
친불교적이었던 박영효와 상의하여 고종에게 진언함으로서
1895년 3월 29일 "승려들의 입성 금지를 완화하라."라는 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승려의 입성 해제 문제는 당시 개혁 상황에서
조선 불교계가 풀어야할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조선 승려의 주청이 아니라,
일본 승려의 견백서가 계기가 되어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후일 조선 불교를 위해서도 유감스러운 일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조선 승려의 친일이 더욱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사노의 숨은 의도를 알았다면 일본인의 도움에 의해
도성출입이 해제된 것을 부끄럽게 여겼어야 했는데,
조선 승려의 주류는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아주 크나큰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조선 승려가 도성 출입을 어느 정도 반겼는지에 대해서는
수원 용주사 상순 스님이 조성 해금 견백서를 올린
일본승 사노에게 증정한 감사장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대조선국 경기 수원 화산 용주사 승 석상순은
삼가 배례하고 치하하나이다.
대일본의 존사 각하.
우리는 지극히 비천하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기를
지금까지 5백여 년이라 항상 울적하였습니다.
다행히 교린이 이루어져 이 만리 타국에서 오시어
널리 자비의 은혜를 베푸시니
본국의 승도로 하여금 5백년래의 억울함을 쾌히 풀게 하시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왕경(王京)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실로 이 나라의 한 승려로서 감사하고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제 성에 들어가면서 감히 소승의 얕은 정성으로나마 배례하나이다."
이런 일은 상순 스님만이 아니었습니다.
각지의 많은 승려가 다투어 사노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이같은 친일 감정이 형성되자
사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95년 5월 고종의 성수무강을 빌며
불교의 중흥유신의 대업을 축원하면서
도성 출입을 풀어 준 황은에 보답한다는
'한일 승려 합동 무차 대법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 법회에는 화계사,백련사,용주사 및
금강산의 승도 3백 여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여기에 외무, 학부, 농상공부 대신과
김홍집 총리 대신의 대리 등 20여명의 정부 고관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법회에 참석한 <조선불교통사>를 지은 이능화는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 역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이떤 이는
"중이 감히 성 안에 들어와
궁궐 가까운 곳에서 법회를 열다니 이 어찌된 세상인가?"
하고 화를 벌컥 내었고,
또 어떤 이는
"조선 승려들은 수백년간 문외한이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온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부처님의 광명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구나!"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2) 문경 청화산 무대 신광 스님의 입성 금지 해제건 의
그러나, 이처럼 불교계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승려 입성 해제는
이듬해인 1896년 재차 금지되었다가 다시 해제되었으나,
조치가 내려진 후에도 출입이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1897년 10월 15일자 <독립신문> 잡보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각처의 중들이 서울에 들어오면
그 어느 절에 있으며 무슨 일로 어디를 다니는지 취탐하여
그 중이 실상 볼 일이 있어서 온 것 같으면 서울에 들어오게 하고
만일 일 없이 서울에 들어와 이리저리 한가로이 다니며 황잡한 일을 하는 자는
엄격히 금하라고 경무청에서 근일에 신칙이 대단하더라."
이러한 사실로 볼 때 1897년 가을에도
스님들의 서울 출입이 사실상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반발령 이후에 스님들이 속인의 의관을 하고
도성 출입을 하다가 발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독립 신문>에는 "중의 악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기사도 났습니다.
"경상도 경산의 중 하나가 속인의 의관을 입고
어저께 아침에 정동 대궐 광엄문 안으로 무란히 들어가거늘
궁내서 순검이 그 중을 잡아 사문한즉
그 중의 대답이 동문서답하는 고로 즉시에 경무청으로 보냈다더라."
1898년에는 우연한 사건으로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해 봄에 고종이 대신들과 더불어 제사를 지내려고
지금의 조선 호텔 안에 있는 원구단에 행차했습니다.
휘장을 두른 제단 앞에서
황제를 중심으로 대신들이 앉아 있는데,
감자기 포장 틈으로 단발의 머리빡 하나가 불쑥 들어왔습니다.
마침 시국이 어수선한 때이라서
고종과 대신들은 자객으로 알고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머리를 하늘로 들고
천안통을 한다며 고종의 제위에 대해 예언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호위병이 잡아 심문하니 개운사의 승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해프닝이 비약해서 그 원인은 승려들의 입성을
허용한데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다시 금족령이 내려졌습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마곡사로 출가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듬해인 1899년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서울에 들렀는데,
그 때까지도 나라의 입성 금지 조치 때문에 성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의 절에 돌아다녔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무렵까지도 입성 금지가 행해졌습니다.
한편, 개화 사상으로 평등의식이 급속히 확산되던 때에
또다시 시대 착오적인 입성 금지령이 내리자
당시 조선 불교계에도 이에 대한 비판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1899년 2월 18일자 <독립신문>은
경상도 문경군 청화산의 무대 신광스님이
당시 정부의 내무대신에게 청원한 것을
'중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4일간 연재를 하였습니다.
" 다름 아니라 소승이 저번에 산을 떠나서
서울 동대문 밖에 당도하여 문 안으로 들어오려 한즉
우직한 관인이 막고 가로되
작년부터 중이 서울 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도로 금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하기에
소승이 물러나 절에 돌아와 쉬면서 가만히 생각한즉
실로 조정의 의론을 알지 못하겠는지라.
중이 서울 문 안에 들지 못한 지는 500년에 가까운지라.
산골에 분주하며 운림에 호읍하고 탄식하여 가로되
새와 짐승은 오히려 미물이로되
오히려 우리 땅을 고르게 적시는데
무릇 우리 중들은 도리어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만도 못하고
또는 소와 말과 닭과 개와 노예와 걸인들과
각국 종자 다른 사람들도 다 모두 자유지권으로
서울 문안에 임의로 출입하는데
우리 중은 모두 대한 500년 살아온 인민이요
대황제 폐하의 일시적자이거늘
성문 밖으로 쫓아버린 물건같이 본즉
중은 무슨 큰 죄가 있어서 그리들 하나이까.
....
을미년 봄에 조정에서 조치를 내리사
중들도 서울 문안에 들어 다니게 하시니
중들도 하늘의 밝은 해을 보는 것 같아
모두 기뻐하며 서로 하례하여 가로되
"우리도 이제 대한 백성이구나" 하고 경축함을 마지 아니하였더니
또 중들을 서울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순검들은 서로 독촉하여 몰아내게 하옵니까.
....
지금 천하 각 절과 중들은 모두 내부에 호적을 한 즉
내부 대신 각하는 어찌 일시지정으로
중도 문 안에 들어 다니라는 영을 내리지 아니하고
중들은 세계에 버린 물건으로 차치하시니
어찌 원통하다 하지 아니하겠소.
그러함으로서 중의 기상이 조잔하여
노예 거걸지배들도 중을 보면 너라고 하고
산협과 해우에 사는 우맹(어리석은 이)도 중을 보면 놈이라 하고
강촌에서 구타를 당하고 패류에서 의관을 찢기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오늘날 대황제 폐하의 아름다우신 덕이
금수와 초목에까지 미치시는데
어찌 홀로 중들만 퇴출하여 도성 문 안에 들지 못하게 하나뇨.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전일에 들지 못하던 정사를 들고
재일에 베풀지 못하던 영을 베풀어 보도록 하여
중들로 하여금 돌아갈 때가 있게 하심을 바라나이다."
문경의 한 스님이 적은 글이지만
당시 불교계의 절박하고 생생한 현실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소와 사회적 평등 분위기로 20세기에 접어들며
비로소 승려의 서울 입성이 자유로와지게 되었습니다.
================

당시 일본 스님이 본 한국 불교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습니다.
한국 불교는 이미 쇠퇴하였으며,
한국의 승려들은 무지하고 교양이 없고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의 교화 내지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의 포교 대상일 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당시 일본 불교의 한국 포교 전략은
당연히 일본의 조선 침탈을 용이하게 만든다는 정치적 논리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초기 한국에 들어온 일본 승려들은
포교소를 세우고 선물, 유학 등의 여러가지 방략을 썼습니다.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승려의 서울 입성 해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하는 조선 왕조의 악법을 해제해 주는데
일본 불교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한국 불교사상 큰 의미를 갖습니다.
조선 시대 불교가 얼마나 천대를 당하고 있었는지를 대개 알고들 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안은 바로 ‘입성 금지’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조선 불교의 위상을 잘 상징하는 사안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해금’은 일본이 착안한 방책 중 가장 효과가 큰 것이었고,
해금 조치를 계기로 일본 불교에 경도되는 경향이 더욱 커집니다.
동학 혁명이 비록 좌절되었지만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사회의 모순에 맞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참여 정신과
자신들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사회를 바꾸려 했던 혁명성에 있습니다.
동학교도들은 일제의 침탈에 반대하고
양반 상놈의 신분제를 혁파라는 반제 반봉건의 큰 대의 외에도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애고, 과부의 재가를 요구하였습니다.
즉, 자신들이 느끼는 구체적 인권 불평등 조항의 폐지를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승려의 입성 금지 조치는 문경의 한 스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대표적인 억불 악법이었습니다.
개돼지도 서울의 땅을 밟을 수 있는데,
스님이라는 이유 하나로 도성 출입을 금지당하고
노예나 우맹에게까지 중 놈 소리를 들으며
무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스님들이 무슨 자존감을 가질수 있었겠습까?
백정들에게 평량갓을 쓰게 하여
백정 스스로를 천한 놈이라고 인식하게 만들고,
과부들이 재가를 하면 지조 없는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현실 속에서
백정과 재가 과부들은 자신들의 삶에 당당하지 못하고 자존감 없이 살아갈수밖에 없습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개화 상황에서 동학 농민들은
백정과 재가 과부의 인권을 당당하게 문제 제기한 것에 비해
스님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악법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악법 철폐의 요구가 당사자인 조선 스님들이 아니라,
일본 승려의 주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도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일본의 한 승려의 견백서에 굴복하는 조선 정부의 모습을 보고
당시 조선 스님들은 일본의 힘을 보고 일본의 힘을 빌어 일본에 밀착해 나갔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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