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길상사>
1. 백석 시인과 김영한 보살
북한산 자락인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吉祥寺).
길상사는 1997년에 세워져 역사는 짧지만,
최고급 요정이던 ‘대원각’이 불교 도량으로
탈바꿈한 특이한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한 여인이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부처님 도량으로 보시하여
부처님을 신행하는 멋진 도량으로 조성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바로 김영한(1916∼1999) 보살입니다.
김영한은 열다섯 살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우물이 빠져 죽어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된 김영한은 기생으로 나섰습니다.
김영한은 미인으로 춤은 물론 시와 글과 그림이 뛰어나
서울 최고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당연히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녀를 연모했습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녀의 뛰어난 재주를 아까워하던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를 후원하던 사람 중 한 명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함흥으로 돌아왔습니다.
은인을 옥바라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이자
시인인 백석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하루 만에 동거를 시작해
석 달 간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가 바로 김영한입니다.
그런데, 백석의 아버지는 아들 백석을
기생인 김영한에게 떼놓기 위해
다른 여자와 강제 혼인시켰습니다.
그러자, 백석은 혼인날 밤 도망쳐
먼저 서울로 와 있는 김영한과
다시 만나 한동안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김영한은 젊은 백석의 앞날을 걱정해
헤어지자고 했고,
그런 김영한에게 백석은 러시아로 떠나자고 졸랐습니다.
이에 김영한은 숨어버렸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시인 백석은 혼자 러시아로 떠났고,
그 뒤 둘은 영영 생이별해야 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백석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며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자
두 사람은 생이별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후 김영한은 서울에서
요정을 열어 큰돈을 벌었습니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1960~70년대 막후에서 '요정 정치 시대'를 펼쳐갔습니다.
2. 김영한 보살과 법정 스님
‘대원각’은 당시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고
지금의 ‘길상사’입니다.
요정을 했지만,
허전한 그녀의 가슴을 채워준 것은
바로 법정 스님이 쓴 책과 불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김영한은 살아 생전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
하루 동안 곡기를 끊고 방 안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그를 기렸다고 합니다.
또한, 수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백석과 다하지 못한
이승의 사랑을 저승에서 잇고자 소원하였습니다.
1987년 김영한은 미국에 있던 법정 스님을 찾아
그녀의 전 재산인 대원각을 쾌척하겠다고 했습니다.
대원각은 당시 가격으로 1천억 원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을 살던 법정 스님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후 무려 10년 동안 이어진
무소유의 실천 의지로 결국 대원각은
법정 스님이 머무는 암자의 본사인 송광사에 희사되었고,
길상사로 개사하기까지 송광사 서울 분원이 되었습니다.
3. 길상사와 김영한 보살
1997년 길상사 개사식에서 김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고
고백함으로써 세기의 로맨스가 마침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개사식 때 미국에서 돌아온 법정 스님이
김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吉祥華) 보살'이라는 법명에서 유래합니다.
길상화 보살(김영한)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 14일
목욕재계 후 길상사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한때 서울의 유명한 요정이던 길상사는
아름다운 숲 속에 옛 요정 건물들을 도량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제일 큰 연회가 펼쳐지던 건물은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극락전이 되었습니다.
한 때 큰 연회가 펼쳐졌던 공간이 지금은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도하는 도량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연회가 펼쳐지던
작은 건물들은 시민들이 들어와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닦을 수 있는 수행 공간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길상사는 모든 사람에게
길하고 상스러운 공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4. 오늘날의 길상사
그리고, 길상사 관음 보살상은
천주교 예술가인 최종태 선생이 건립한 것으로,
최종태 선생이 명동 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습니다.
한편, 2010년 법정 스님도
이곳 길상사에서 입적했습니다.
스님이 처음 출가하신 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입니다.
출가한 사찰과 한때나마 같은 이름을
사진 사찰에서 입적하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요.
지금 길상사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무소유>, <불교성전> 등을 비롯한
불교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무소유의 수행자였던 법정 스님의 향기를
길상사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길상사에는 길상화(김영한) 보살의 공덕비가 있고,
사당에는 길상화 보살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어느 기자가 노년의 길상화 보살에게
언제 백석이 가장 보고 싶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길상화 보살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가 어딨나? 늘이지..."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생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이 되지 못했지만,
좋은 도량을 희사한 공덕으로
내생에는 길상화 보살의 염원이 이루어져
사랑했던 백석과 늘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백석과 그의 시를 가슴 깊이 사랑했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소유였던 대원각을 희사했던 김영한 보살!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눈이 내리던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습니다.
백석 시인과 김영한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와
법정 스님과 길상화 보살의 무소유의 실천의
스토리가 살아 있는 길상사!
서울 한복판의 한적한 도량의 향취를
느끼기 좋은 도량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상화 보살이 깊이 사랑했던 백석이
사랑했던 길상화 보살을 위해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길상사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유튜브 극락회상 아미타온 - 길상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