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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생애

고행과 선정수행 (부처님의 일생4)

by 아미타온 2023. 8. 3.

<고행과 선정 수행>

 

지난 시간에 브라만교와 부처님의 생각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간략하게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면서

만나게 된 수행자들을 살펴보며

부처님께서 어떤 시각을 가지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도의 요가 고행 수행자>

1. 고행 수행자

 

왕궁을 떠나신 부처님께서 처음 만난 수행자는

브라만 계급의 고행(苦行) 수행자였습니다.

 

브라만계급이라고 해서 제사나 베다의

암송만을 수행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인도에서 고행은 아주 오래되고,

가장 각광받은 수행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행이 그만큼 대접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극기(克己)입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나태와 싸우는 것은

성패를 떠나 어렵고 존경할만한 일입니다.

 

고행은 자신과의 싸움이 주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친 육체의 학대,

육체에 대한 부정이 그것입니다.

 

영혼 혹은 진정한 자아를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육체로부터 영혼(자아)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한 철학,

이 잘못된 전제가 존경할만한 극기의 실천수행을

극단적인 고행으로 치닫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극기를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끝없는 육체에 대한 학대로,

혹은 겉으로는 고행이었지만

육체에 대한 집착의 한 종류가 되고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만난 고행자는

내세에 천계(天界)에 환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행을 통해 전생과 이번 생의 업보를 갚아

특별한 착한 선행을 하지 않더라도

천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이 주장은 당시에

많은 고행자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두 가지로 비판하셨습니다.

 

첫째는, 천계에 환생한다하더라도

또 다시 윤회하게 될 것이니

환생을 원한다지만

결국은 쾌락을 쫓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해탈이나 열반을 원하는 사람들이

취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는, 과연 전생이나 현생의 나쁜 업을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

씻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셨습니다.

 

결론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일관된 가르침이십니다.

 

예를 들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이 있다고 합시다.

 

이 중생은 전생의 과보로 인한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의가 아닌

타의적인 고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설사 이렇다 할지라도

이 과보를 끝낸 중생이 천계에 환생하겠습니까?

 

그 마음이 자비롭게 바뀌던가,

아니면 보시와 같은 선행을 쌓는

행위없이 천계에 환생할 수는 없습니다.

 

즉, 자의적인 육체에 대한 고행만으로는

절대 더 나은 조건의

환생을 맞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8정도의 가르침이 바로 이 대목을

일목요연하게 설하시는 내용입니다.

 

‘바가바’라는 고행자를 떠난 부처님은

이번에는 선정(禪定)을 닦는 명상수행자를 찾아가셨습니다.

 

<명상>

2. 선정 수행자

 

먼저 ‘아라라 칼라마’ 라는 수행자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이라는

선정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라라 칼라마의 현실인식은 이렇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소유에 대한

집착심을 없애면

마음의 평화와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방법은 고행주의자들이

행하는 육체에 대한 괴롭힘이 아니라,

마음을 집중하고 고요히 하여

호흡이나 명상주제를 관조함으로써

결과를 얻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정 수행법. 혹은 명상법은 고행법과 함께

인도의 전통적인 양대 수행법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 명상수행법을 개량하시어

불교 수행법으로 차용하셨을만큼

탁월한 효과가 있는 훈련법입니다.

 

물론 고행과 명상 수행은

인도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발전된 종교나 수행체계가 있었던

고대의 여러 문화권에서 두루 발견되는 방식입니다.

 

어쨌거나 부처님께서는

바가바 고행자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선선히 아라라 칼라마의 문도가 되어

수행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라라 칼라마의

경지와 같은 ‘무소유처정’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러나. 원하시던 해탈은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깊은 마음의 평화는 얻으셨지만,

윤회의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의 지혜는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은 탁월합니다.

그러나 궁극의 지혜는 이 경지로는

얻을 수 없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함께 문도를 이끌자는

아라라 칼라마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다시 새로운 명상수행자를 찾아가십니다.

 

명상(선정)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두 번째 찾아간 명상수행자는 

웃타카 라마풋다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경지에 이른 명상가였습니다.

 

비상비비상처는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닌’ 선정의 경지를 말합니다.

 

웃타카 라마풋다는 ‘관념’

즉 생각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본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생각을 안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만약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활동을 할지라도 식물인간과 다를게 없을 것이고,

바로 직전의 자신의 행위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심한 기억상실증환자가 될 것입니다.

 

이래서는 해탈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인간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비상비비상처’는 그런 식물인간이나

기억상실증환자가 되자는게 물론 아닙니다.

 

고정관념의 타파와 그럼으로써

관념에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의

직관에 의지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번뇌와 사념은 마음의 갈등,

즉 생각이 복잡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공포. 불안. 미련. 애착. 미움. 원망. 질투...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 자체로 번뇌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라라 칼라마는

자아에 대한 무집착과 소유에 대한

무집착을 이루자는 것이었고,

웃타카 라마풋타는 아예 감정을 공포니 불안이니 라고

개념짓는 관념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 를 충실히 살고 지나가면

모두 놓아버리라는 것이지요.

 

방법론으로는 두 사람 모두 명상(선정)법을 택한 것이고요.

 

부처님께서는 웃타카 라마풋타의 경지가

아라라 칼라마보다 진일보 했다고 판단하셨나 봅니다.

 

바로 웃타카 라마풋타의 문도가 되어 수행을 하셨으니까요.

 

<절하며 녹야원을 순례하는 불자들>

3. 고행림으로 향하신 부처님

 

이후 빠른 시간 안에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에 오르신 부처님.

 

그러나 역시 해탈은 요원했습니다.

 

‘지금 여기’ 에 충실하고, 고정관념과

쓸데없는 관념을 덧붙이지 않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탈의 지혜는 얻을수 없으셨습니다.

 

이번에도 함께 문도를 가르치자는

웃타카 라마풋타의 제안을 거절하신 부처님은

앞으로 어떻게 수행할까를 고민하십니다.

 

명상을 통해 얻으신 점이 많지만

해탈의 방법을 찾지는 못하셨으니까요.

 

얼마를 고민하신 부처님께서는

결단을 내리십니다.

 

‘얼치기 고행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철학을 가진 고행 수행을 한 번 해보자.

 

양대 수행 중에서 선정(명상)수행을

해본 결과 해탈법은 찾지 못했지만,

분명 마음의 평화와 자신을 제어하는 기술은 얻어내었다.

그러니 고행법에서 해탈의 실마리를 얻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신 부처님께서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고행자들이 모여 수행하던

우루벨라의 고행림(苦行林)을 향해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유튜브 극락회상 - 부처님 생애(4) 고행과 선정 수행>

https://youtu.be/Zg6kRAURYyE?si=Q_kB5bCjh00dRmp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