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처님 생애

석가족의 멸망 (부처님의 일생37)

by 아미타온 2023. 10. 9.

 

<석가족의 멸망 - 부처님의 일생(37)>

 

< 인도의 소년>

 

1. 원한을 품은 비두다나 왕자

 

코살라국의 파세나딧 왕은

석가족의 왕녀를 후궁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석가족의 카필라국은 코살라국의

영향권 안에 있던 나라였지만,

자기 부족의 혈통에 대해 "태양의 후손"이라

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코살라국 파세나딧왕의 요청에

석가족의 고귀한 공주를 보낼 수 없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의 요청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마하나마가

집에서 일하던 여종과 관계하여

낳은 딸을 분장하여 석가족의 정통 왕족의 딸인 것처럼

속이고 파세나딧 왕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여종의 딸과 파세나딧 왕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비두다나 왕자였습니다.

(비두다나 왕자를 한문으로는 '유리 왕자'라고도 합니다.)

 

비두다나 왕자는 8살 되던 해에 외가인

석가족 카필라국에 놀러 왔습니다.

 

마침 카필라국에는 부처님을 모시고 설법을 들을 강당을 지어

낙성식을 화려하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철부지였던 비두다나 왕자는

시종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가 놀다가

부처님이 앉을 높은 사자좌에 앉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카필라국 왕족들은

“역시 종년의 자식이라서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욕하고 화를 냈했습니다.

 

비두다나 왕자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종년의 자식’이라며 모욕을 당한 것이 더욱 분했습니다.

 

이 모욕을 언젠가 반드시 앙갚음할 것을 결심하고

울분을 참으며 코살라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코살라국 파세나딧왕에게는

‘제타 태자’라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이 강했던 비두다나 왕자는

코살라국 군사령관과 결탁하여

아버지를 몰아내고 쿠테타를 일으켜 왕이 되었습니다.

 

코살라 국왕이 된 비두다나 왕은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펼쳤는데,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던

석가족의 카필라성을 향해 마침내 출정을 하였습니다.

 

<고목 나무에 앉아계신 부처님>

2. 고목 나무에 앉으신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

카필라국으로 가는 큰 고목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선정에 들어 계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비두다나 왕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잎이 무성한 나무숲을 놓아두고

어찌하여 말라버린 고목나무 밑에 계십니까?"

 

  "일가 친척의 그늘이 다른 그늘보다 시원하기 때문이오."

 

 비두다나 왕은 석가족을 치러가는 것을

중지해 달라는 부처님의 뜻을 알아채고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비두다나 왕은 이전의 모욕감을 떠올리며

복수심에 불타올라 2차, 3차로 석가족을 치러 갔습니다.

 

그 때에도 똑같이 고목 나무 아래 부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래서, 비두다나 왕은 전쟁 없이 물러났습니다.

 

그렇지만, 유리왕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번째로 다시 군대를 보내어 석가족을 치러 나아갔습니다. 

 

부처님은 과거세에 맺어진 깊은 원한은

더 이상은 막을 수가 없다며

고목 나무로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군대>

3. 석가족의 멸망

 

 마침내 비두다나 왕은 카필라 성을 침입하였습니다.

 

복수심에 불탄 비두다나 왕은 석가족을

무기로 죽이지도 말고 성난 코끼리가 밟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카필라 국왕이었던 마하나마왕은

석가족의 비참한 최후를 차마 볼 수가 없어

유리왕에게 간청하였습니다.

 

 "내가 저 연못의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만이라도

석가족이 마음 놓고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비두다나 왕은 그것만은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물속으로 들어간 마하나마 왕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비두다나 왕이 확인해보니

마하나마 왕은 물속에 들어가

머리카락을 나무뿌리에 묶어

물위로 떠오르지 않게 한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석가족이 탈출해 목숨을 건졌고,

이를 본 비두다나 왕은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비두다나 왕의 악행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시녀들을 데리고

아틸라 강에서 연회를 하던 왕은

갑자기 비가 내린 비로 홍수를 만나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카필라성에서 개선하지 7일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벼락이 쳐서 궁궐은 불타고 말았습니다.

살육의 과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강대한 코살라국도 점점 세력을 잃고

마침내 마가다국의 아자투삿투왕에게 흡수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카필라 성터>

4. 부처님의 슬픔

 

일본 속담에 "부처님도 삼세번"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일이라도 상대에게

3번이나 간곡히 만류하고

기회를 주었는데도 상대가 안 된다면

그때는 인연을 잘 받아들이고

다음에 인연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삼세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이 석가족의 멸망과 관련되어

세 번 고목나무로 나가셨던 있습니다.

 

석가족의 멸망은 부처님의 말년인 76세때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처님이 가장 아끼시던

상수제자 사리불 존자는 병으로,

목련 존자는 이교도들의 박해로 살해되어 열반에 드시게 됩니다.

 

이 두 분의 죽음 후 부처님께서는

깊이 아쉬워하시며

"사리불과 목련이 없는 이 모임은 웬지 휑하니

텅빈 것 같이 느껴지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말년에 당신의 고국의 멸망과 사랑하는

두 제자의 죽음을 지켜본 부처님의 마음도 슬프셨을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인연의 흐름을 담담히 지켜보며,

그 슬픔이 당신을 파괴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갖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 극락회상 - 부처님 생애(37) 석가족의 멸망>

https://youtu.be/gXU8b01zE0o?si=IOJ5xqbjJFac1q5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