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16) -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百劫積集罪 一念頓蕩盡)
오랜세월 쌓인죄업 한생각에 없어지니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마른풀이 타버리듯 남김없이 사라지네.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죄는 본래 실체가 없는데 마음을 좇아 일어나므로
마음이 소멸하면 죄 또한 없어진다.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
마음도 없어지고 죄도 없어져서
그 두가지가 함께 공해져서 없어질 때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회로다.
1.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는
'백겁을 두고 쌓은 죄업을 한 생각에 모두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는
'마른풀을 불태우듯 남김없이 없애지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애착과 분노와 멍청하고 어리버리하려는
고질적인 탐진치의 습성을 뿌리 뽑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고질적인 습성이라고 했지만
원래부터 있어 왔던 것이 아니라,
나쁜 습관을 통해 쌓여온 것이므로
좋은 습관으로 돌이키면 얼마든지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질적인 습성을 뿌리 뽑으신
부처님 당시의 아라한들의 삶을 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쌓아온 악업을 이번 생에서
뿌리 뽑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념돈탕진’을 한순간에 모든 죄업을
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만 새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백겁동안 지은 죄업을
백만겁 동안의 보시와 자비행으로 갚
아나가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천만겁 그 이상이 걸려도 좋다는
마음을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사(生死)를 두려워해야하지만,
역설적으로 생사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백겁적집죄를 일념에 없애겠다는
용기와 서원도 중요하고 그 이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옥문을 열고 내가 가겠다는 보살의 대비 원력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큰 은혜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부모님께 내가 이생에서 행한
잘못됨이 있다고 합시다.
나의 잘못을 거의 모든 부모님들은 용서해 주실 겁니다.
잘못을 묻거나 갚으라고 하시지 않겠지요.
백겁적집죄’도 그와 같은 관점에 놓고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윤회관으로 보자면 중생 중에
부모형제가 아니었던 중생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처자와 권속이 아니었던 관계가 거의 없었고,
그러면서도 원수와 미움의 관계가 아니었던
관계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업이 있는데,
그 죄업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타인에게
지은 죄업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 이해는 참회나 업의 소멸을 향한
사유나 이해를 어렵게 하고, 형식적으로 만듭니다.
내가 참회해야하고 갚아야 할 빚은
타인에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들은 과거생 어느 때는 모두 나와
아주 밀접한 혈연이나 지인들이었겠죠.
이 세상 모두가 결국에는 그렇게 얽히고 얽힌
관계들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백겁동안 지어온 악업입니다.
일념돈탕진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얽히고 얽히라는 뜻이 아니고,
죄의식에 계속 사로잡혀있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가까운 존재들에게 저지른 죄업임을 통찰해서
내가 백만겁 동안의 자비행과 보살행으로 갚아나가겠다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2. 공에 대한 이해
다음은 죄무자성종심기
(죄의 자성은 본래 없고 그 마음이 사라지면),
심약멸시죄역망
(마음에서 일어난 죄업 또한 없어집니다)
죄망심멸양구공
(죄와 생각 흔적 없이 모두가 공하여야)
시즉명위진참회
(이것을 이름하여 진짜 참회라고 하나이다)입니다.
죄무자성종심기,
'죄의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해석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특히, 재가자들은
출가 수행자와는 다른 입장이지요.
깨달음을 얻자는 것은 같은 입장이지만,
재가자는 세상의 평화와 안락을 위한
갖가지 자비행과 보시행을 담당해야할 보살들입니다.
그러므로 공에 대한 지나친 천착은
재가보살의 활동력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삼법인과 십이연기에 대한 철저한 사유와
이해력으로도 '공'에 대한 '이해'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500년 이상 이루어진 불교사상이며 철학입니다.
그것을 짧은 우리의 삶 동안에
모두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공'을 모르고
불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그 '공'을 이해하기위해 대승의 논서를 섭렵하고
대승불교를 왔다갔다하면서 헤매는 것도 지나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열반을 뒤로 미루면서 중생계에서
자비행과 보시행을 하겠다는 것이
대승보살의 서원이며 원력인데,
너무 공공(空空) 거리는 경향이 있지 않나
염려가 되는 면도 있습니다.
거기에 불교를 지나치게 어렵게 만든 원인에도
'공'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만 되어있으면,
불교는 어려울 수가 없다고 봅니다.
행동함과 그 행동함이 자연스러워지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이해의 어려움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공'에 대한 지나친 형이상학적 논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부 학자와
소위 말하는 불교 엘리트 집단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공(空)'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삼법인과 연기법에 대해
오랜 시간을 숙고하고 연구하고 살펴보셔야 합니다.
즉, 공을 이해한다고 '공'에 관계된
서적과 논서로 뛰어들지 말고
기본적이라고 하는 삼법인과 연기법에 대해
공부하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무상하고,
항상하는 것이 없으므로 괴로움이며,
따라서 ‘나(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삼법인의 가르침을 연기법에 입각하여 잘 명상하고
나의 삶에 적용하면 ‘실체가 없이 비어있다’는
‘공(空)’의 진리를 체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3. 참회진언
다음은 ‘참회진언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입니다.
‘옴’은 전에 설명드렸고,
‘살바’는 ‘일체’라는 뜻이며,
‘못자’는 ‘붓다’의 표기입니다.
‘모지 사다’는 ‘보리살타(보살)’의 뜻이고,
‘야’는 ‘~에게’라는 뜻입니다.
‘사바하’는 원만성취의 종결어미구요.
해석하면. ‘일체의 불보살님에게 귀의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참회진언>이든 <축원진원>이든
<신묘장구대다라니>이건
거의 모든 진언의 의미가
‘일체의 불보살께 귀의합니다.’
이 한 문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불보살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에 대해 자주 새기고 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일체의 행복과 안락과 평안이
‘이 일체의 불보살께 귀의합니다’
라는 한 문장에 있다는 것이
예로부터의 불교의 비밀이자 가르침입니다.
<유튜브 극락회상 - 천수경(16)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https://youtu.be/-lZPg9_FEBs?si=1hU-9eZfkMdccL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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