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1. 무위사의 창건
월출산 남쪽 기슭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무위사(無爲寺).
전남 강진군 성전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무위사는 원효 대사가
‘관음사’로 창건했고,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창했다고 합니다.
고려 초기에는 9산선문 중
가지산파에 속한 선종 사찰이었으나,
이후 물과 육지를 떠도는
영가들을 구제하는 의식인
수륙재를 행하는
천태종 수륙 사찰이 되었습니다.
2. 무위사 극락보전과 수륙제
무위사에 들어가면
단아한 극락보전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깁니다.
국보 13호로 지정된
멋진 극락보전입니다.
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고려 말 강진, 해남, 장흥을 비롯한
남도 해안은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습니다.
고려 말 출몰한 왜구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남도 백성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기 위해
극락보전을 세운 것입니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망령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의식으로 적까지도 포용한
모든 전몰자를 위무하는 불교 의식입니다.
죽은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죽
은 망자에 대한 애도와 함께
적에 대한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불교의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대왕이
출가한 삼촌인 효령대군 감독 하에
월출산 자락의 양지 바른 무위사에
극락보전을 세우고 수륙재를 거행했던 것입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수덕사 대웅전과 닮았습니다.
수덕사 대웅전에 비해
후대에 조성되었지만,
낮은 기단 위에 지붕과 기둥이
동일한 비율로 되어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공포를 여러개 얹지 않은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으로
간결하고 단아한 느낌입니다.
편안하고 단아한 극락보전은
수륙재를 지내기 위한
세심한 배려 속에
공을 들여 조성한
예배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3. 무위사 아미타 삼존불
극락보전 전각도 멋지지만,
극락보전 내부도 아름답습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습니다.
자비로운 상호의 세 분의 불보살님 뒤로는
아미타 삼존도 벽화가 장엄되어 있습니다.
4. 무위사 후불탱화
이 벽화는 찬란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초기 새로운 양식이 결합된 걸작으로
국내 아미타 삼존도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국보 벽화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관음, 지장 양보살님이 협시하고 있고,
그 위로 여섯 분의 나한이 불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원형 구도입니다.
빨강과 녹색의 밝은 채색,
화려한 옷의 문양과 영롱한 영락 장식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고려 불화의 대표적 기법인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리는
유려하고 부드러운
옷 주름선은 예술입니다.
이 멋진 벽화와 함께
아미타 삼존 부처님을
법당에서 참배할 수 있어
환희심으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벽화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극락보전을 완성하고
늙은 화공이 49일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뒤 벽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49일째 되던 날
주지 스님이 너무 궁금하여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탱화를
그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크게 놀란 주지 스님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침 파랑새는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님 눈동자를
화룡점정하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님은 눈동자가
없다고 합니다.
화룡점정의 완성을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방심과 부정을 타지 않고
결계를 잘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5. 무위사 백의관음도
아미타 삼존 벽화 뒤를 돌아가면
백의 관음 벽화가 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 백의관음도 중
백미로 꼽히는 벽화입니다.
하얀 백의 관세음보살님이
파도 위에 떠 계시고,
두 손으로 정병과 버들가지를 살짝 잡고
고해(苦海) 중생의 소리를 듣고 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관세음 보살님은
예배하는 노승을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유려한 선과 그윽한 눈길이
너무나 거룩합니다.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관세음보살님을 바라보는
노승의 자세와 표정은
관세음 보살님에 대한
공경과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극락보전에는 그 외에도
비천도를 비롯한 여러 벽화가 있어
법당을 극락처럼 장엄하고자 했던
조선 초기 화공들의
뜨거운 불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6. 무위사 선각대사 형미 탑비
한편, 극락보전 마당에는
가지산문의 선승으로
태조 왕건을 돕다가
궁예에게 목숨을 잃은
‘선각대사 형미탑비’가 있습니다.
형미 대사는 궁예의 휘하 장수로 있던
왕건의 초청으로 이곳 무위사 주지로
6년간 주석했습니다.
후삼국 시대 4대 선승 중의 한 분으로
왕건 군대의 군법사이기도 했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1년 전에
궁예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후일 왕건은 형미 대사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총명하여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궁예는
후대에는 스스로를 ‘미륵불’로 칭하며
관심법으로 공포 정치를 했습니다.
형미 대사는 궁예를 강력히 비판하고
왕건을 옹호하다 처형당했습니다.
형미 대사는 어지러웠던 후삼국 시절
왕건의 중요한 군사기지이자 거점이었던
나주 지역의 민심을 위무하던
어른이자 동료였습니다.
그런 형미 대사의 죽음을 애통해한
왕건에 의해 세워진 탑비가
대사가 머물던 무위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전란의 시대에 스님 노릇 하는 것도
참 힘겹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때로는 왕사나 국사가
되는 기회이기도 했겠지만,
권력에 눈먼 스님이 아닌
보살의 길을 가는 출가 수행자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시대에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하지 않고
분연히 정치적 노선을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 선지식 중의 한 분이
바로 형미 대사였습니다.
7. 무위의 세계와 극락
무위사의 ‘무위(無爲)’는
인간의 탐욕과 분노인
인위(人爲)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극락은 무위의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입니다.
평온하고 단아한 극락보전이 있는
무위사에서 안락한 무위의 햇살을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극락회상 - 강진 무위사>
https://youtu.be/6eN0ltRaA50?si=ZiKTlf51aSLbT7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