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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31) - 반야부 경전(10) / 유마경(4) - 번뇌즉보리 /진흙속의 연꽃

by 아미타온 2024. 1. 3.

<불교의 역사(31) - 반야부 경전(10) / 유마경(4) - 번뇌즉보리 /진흙속의 연꽃>

 

<관세음보살 (일본 교토 산젠인)>

1. 여래(부처님)이 되는 씨앗

 

<유마경>의 ‘불도품(佛道品)’에는

‘여래(부처님)가 되는 씨앗’의 법문이 나옵니다.

 

“여래가 되는 씨앗(如來種性)은 무엇입니까?”라는

유마 거사의 질문에 대해 문수 보살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번뇌야말로 실로 여래가 되는 씨앗입니다.

무위(無爲)를 봄으로써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위없는 깨달음에 대해 발심하지 못합니다.

 

그에 반해 번뇌가 우글거리는 유위(有爲) 가운데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정작 위없는 깨달음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메마른 고원에서는 결코 아름답고 향기로운 온갖 연꽃들이 피어날 수 없고,

오직 연꽃은 진흙밭이나 더러운 물 속에서만 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무위(無爲)의 궁극성을 믿는 자들에게는

불법의 꽃이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불법의 꽃은 오직 진흙밭이나 더러운 물과 같이

번뇌가 들끓는 곳에 처한 사람에게만 환하게 피어납니다.

 

공중에 뿌린 씨는 싹을 내지 않지만 땅 위에 뿌린 씨는 잘 자라납니다.

중생들과 함께 사는 번뇌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깨달음에 대해

크게 발심할 때 비로소 불법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야말로 여래가 되는 씨앗임을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넓은 바다를 건너지 않으면 값비싼 보배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번뇌의 바다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서는

결코 여래의 일체지에 대한 염원을 일으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끼 정원과 동자상 (일본 교토 산젠인)>

2. 번뇌와 보리(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번뇌즉보리(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다)’

‘진흙 속의 연꽃’이라는 유명한 말씀이 나오게 된 유명한 법문입니다.

 

번뇌 속에 여래의 씨앗이 있고

보리(깨달음)가 있다는 말씀을 어떻게 접근해 들어가야 할까요?

 

이 말씀은 중생(번뇌)이 있기 때문에

보살은 보리심을 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중생(번뇌)이 없었다면

보살은 보리심을 기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불보살님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중생(번뇌)이라는 것입니다.

 

불보살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 중생들은

괴로움의 삶에서 벗어날 길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보자면 우리들 가엾은 중생들로 인해서

불보살님들이 서원을 내고 불보살님이 되실 수 있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토신앙>에서 아미타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자비와 구원)도 똑같은 구조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으로 인해 우리 중생들이 구제받는 것이지만,

역으로 보자면 중생이 없었다면 아미타불의 서원도 없었을 것이고.

아미타불의 서원이 없었다면 극락 정토를 탄생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이면서도 같은 중생을 무척 싫어합니다.

일면 그 생각에 이해는 가지만, 지나치게 치우친 생각입니다.

 

<연꽃>

3. 진흙 속의 연꽃

 

<유마경>에서는 메마른 고원에서는 불법이란 꽃을 피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즉, 중생들이 사는 진흙의 현실을 떠나서 불법의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열반(무위)을 히말라야의 설산과 같은 고고한 세계라고 이미지를 삼고 있습니다.

중생의 현실을 떠나서 히말라야와 같은 고요함에 안주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설산에는 나무와 풀과 같은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유마경>은 번뇌 속에 들끓는 중생의 현실이 불법을 달성하고

여래(부처님)의 씨앗을 틔우는 기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현실의 고통과 욕망과 번뇌를 통하지 않거나,

이를 떠나서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허망하다고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 핀 연꽃’이야말로 대승의 열반에 대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마경>에서는 중생(번뇌)을 통해 보살은 여래의 씨앗을 틔우고,

여래의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보살이 여래의 씨앗을 틔우는 발로는 바로 중생에 대한 자비심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식이나 가족이 죽어가고 힘들고 어려워할 때

나의 소중한 목숨과 돈을 바쳐서라도 도와주려는 마음을 냅니다.

 

그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그 자비심이 나의 자식, 가족, 친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은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약수와 수국>

 

4.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

 

경전에 보면 “보살은 중생의 괴로움(suffer)을 자신의 괴로움(suffer)으로 알고,

중생의 행복(happiness)을 자신의 행복(happiness)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불도는 자비이며,

자비를 확장해나가는 것이 여래의 씨앗을 틔우고

여래의 위없는 깨달음인 성불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마경>과 같은 대승 경전은 중생의 진화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생의 겉모습이 번뇌와 욕망에 물들어 보이지만,

부처님의 씨앗인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자비심보리심을 확장하여 중생의 진화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비로서 누군가를 도와주려 한다면 자신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려다 보면 자신을 개발하고 진화하는 길로 가지 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유마경>은 번뇌(중생) 속에서 보리를 이루고,

중생 속에서 부처를 이루며,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대승 보살도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계곡물 소리와 새소리로

조용하고 안락한 절간을 꿈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속(중생)에서 치열하게 고뇌하지만,

그 고뇌 속에서 자비심과 보리심을 확장하여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들과 함께 동사섭하며

자비와 보리의 길을 가는 재가 보살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해 주는 가르침이 "여래가 될 씨앗"의 법문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