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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44) - 법화경(3) / 약초의 비유

by 아미타온 2024. 1. 29.

<불교의 역사(44) - 법화경(3) / 약초의 비유>

 

<초목과 비(1)>

 

1. 약초(藥草)의 비유

 

오늘은 <법화경>의 7가지 비유 중에서

3번째 비유인 ‘약초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법화경> 제 5품인 "약초유품"에 대해 나오는

‘약초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냇가와 계곡

그리고 땅위에서 자라는  초목과 숲속 여러 약초들은

그 종류가 여러 가지이며 이름과 모양도 각각 다르니라.

 

그런데, 짙은 먹구름이 가득 퍼져서

삼천대천의 온 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비가 흡족하게 내리면

초목과 숲속 모든 약초들의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들이 저마다 골고루 젖게 마련이니라.

 

똑같이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나

그 초목의 종류와 성질에 합당하게 비를 머금고 생장하며

각기 다르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느니라.

 

다시 말해 비록 한 땅에서 자라나고 똑같은 비를 맞더라도

모든 초목들은 각각 차별이 있느니라.

<법화경 제5품 약초유품>

 

<비오는 게룡산>

 

2. 부처님의 법비와 초목의 차별

 

<약초의 비유>를 보면

약초, 작은 나무, 큰 나무의 3종류의 초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종류의 초목이 하늘에서 같은 비를 맞아도

각기 다른 종(種)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르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피웁니다.

 

모든 중생들은 불성(佛性)이 있어 궁극적으로는 성불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초목에도 종류가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의 모든 중생들도

근기, 욕망, 성품 등에 각각 차별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비(法雨)는 모든 중생들에게 차별 없이 내리지만,

중생들의 차별과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른 꽃과 열매를 피운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 불교 수행자에는 크게 나누면

성문, 연각, 보살의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문(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부처님 곁에서 불법의 가르침을 배워서 혼자의 열반을 구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연각은 홀로 인연법(연기법)의 이치를 사유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보살은 성불의 큰 뜻을 세워서 자신과 중생을

다함께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고귀한 서원을 세운 수행자를 말합니다.

 

이처럼 같은 불교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수행의 목적, 근기,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와 차별이 존재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법)의 비를 다함께 맞더라도

그 종류와 차별에 따라 각기 다른 꽃과 열매를 이룬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 바로 <약초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성문, 연각, 보살의 세 종류의 불교 수행자 중에서

어떤 불교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실까요?

 

당연히 보살의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시며,

<법화경>에서도 보살의 수행자가 되어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향한

성불의 길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성문의 종성(種性)을 가진 불교 수행자가

보살의 종성을 가진 높은 단계의 수행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류가 다른 더 높은 종성이 되려면

그만큼 피나는 노력을 통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한 생이 아니라,

수많은 생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법우광시 - 법비가 평등하게 내린다 는 뜻>

 

3. 종성(種性)의 변화의 조건

 

성문에서 보살과 같이 종성이 바뀌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요?

 

저는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자신의 근본 욕구가 변해야 하고,

둘째, 그에 합당한 롤모델이 선명해야 하고,

셋째, 자신의 원함의 절실함이 열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근본 욕구가 변해야 합니다.

사람이 잘 바뀌지 않는 것은 근본 욕구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근본 욕구가 변해야만 다른 종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법화경>에서 혼자의 열반에 만족하는 근본 욕구를 가진 성문이 어떻게 바뀌는가요?

 

자신이 원해서 성취한 열반이 참된 열반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일체의 지혜와 중생 구제를 향해 성불의 길을 가겠다는 욕구를 가짐으로서 바뀌어집니다.

 

즉,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의 욕구를 냉철하고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더 높은 종성으로 변화하려는 욕구를 가지는 것이 종성의 변화를 향한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의 롤모델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의 롤모델이 분명하면

마치 과녁을 세워 놓고 활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과녁이 없으면 화살의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중구난방으로 화살을 날릴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롤모델이 분명하면 마치 과녁이 있는 것처럼

노력이 헛되지 않고 방향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보살이 되겠다는 것과

자신의 롤모델로 원효 대사나 의상 대사 같은

구체적인 대상을 분명히 정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 절실함입니다.

 

절실함은 ‘내가 ~하고 싶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한두번은 그런 마음을 낼 수 있지만, 1년,2년을 넘어 평생하려면 절실해야 합니다.

 

절실함은 구체적이고 꾸준한 행위의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보시를 잘 실천하는 보살이 되겠다고 했을 때

한두번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쉽지만,

평생을 거쳐 보시를 구체적이고 꾸준히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절실함을 갖고 자신의 행위가 바뀌어야만

종의 변화를 향한 길을 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종성에 있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부처님의 법비는 평등하게 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쓸데없는 초목은 없듯이

누구나 약이 되는 성분의 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하늘의 비의 혜택을 보듯이

우리들도 부처님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부처님이 내려주시는 법비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부처님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