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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16) 두 친구 비구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2. 3.

<법구경(16)  두 친구 비구 이야기>

 

<청양 장곡사 약사 여래 부처님>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친구 사이인 두 비구와 관련하여 게송 19번과 20번을 설법하시었다.
 
사왓티에 귀족 출신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인 젊은이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어느 때 수도원에 들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게 되어 가정을 떠나 비구가 되었다. 


비구가 된 두 사람은 각각 자기들의 스승을 모시고

율장에 정해진 바대로 5년간 기초적인 과정을 보냈다.
 
그런 다음 보다 젊은 편이었던 친구는

경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경전에 대해 배워 통달하여 강사가 되었다.


그는 오백 명의 제자 비구를 가르치는 위치에 올랐으며,
다른 한편으로 열여덟 가지나 되는 책임을 맡아

여러 가지 사무를 집행하는 등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보다 나이가 많았던 친구는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수행에 뜻을 두었다.


그는 부처님께 수행법을 자세히 여쭈었고,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네 가지 자세하게 관찰하여야 할 대상과,
그 대상을 관찰하는 방법(위빠싸나)을 가르쳐 주시었다.


그리하여 그 비구는 부처님께 배운 대로 그 수행법을 잘 실천해 나갔다.
그 결과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때 한 무리의 비구들이 그에게로 와서

사념처(四念處) 수행법을 배우고자 했고,
그는 그 비구들에게 수행법을 잘 지도하여

그들도 모두 아라한이 되게끔 해 주었다.


이들 비구들은 아라한 과를 성취하고 나서

부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길을 떠났다.
 
이 때 늙은 스승 비구(나이 많은 친구 비구)는 부처님을 뵙거든

자기 이름으로 인사를 전해 달라고 청했다.


아울러 그 늙은 비구 (나이 많은 친구 비구)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들을 만나거든
역시 자기 이름으로 인사를 올려 달라고 부탁하였고, 

아라한을 성취한 제자들은 그 인사를 잘 전했다.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


 그 후 헤어졌던 두 친구는 오랜만에

제따와나 수도원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 경전을 배운 비구는 친구 비구가

아라한이 된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다만 자기의 학문만을 높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자기의 학문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는 경율론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친구 비구를 놀라고 당황하게 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정황을 천안(天眼)으로 살펴 아시고

젊은 친구 비구가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곧 경전에 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그런데, 경전에 자신이 있었던 젊은 비구는 대답을 잘하지 못하고

아라한을 성취한 늙은 비구만이 정확하게 답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비구는 문자상으로만 경전의 의미를 알았을 뿐으로

수행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진실을 드러내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이 된 비구를 칭찬해 주셨다.


젊은 강사 비구는 마음 속으로 불만이었다.
자기와 같은 우수한 제자에 대해서는 칭찬이 없으시고,

노둔한 친구 비구만을 칭찬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경전을 공부하되 수행이 없는 사람은
마치 남의 소를 보살펴 주고 삯을 받는 목동과 같으며,
직접 수행을 하는 사람은 목장의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시었다.


자기가 목장의 주인이 되어야만 소가 생산해 내는

우유와 치즈 등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경전을 가르치는 강사는 자칫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그것에 빠져서

진실한 내적 경지를 등한시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비록 문자상의 의미는 잘 모른다 할지라도

실제 수행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은 수행자는
참다운 본질적인 문제인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편이 올바른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런 수행자라야 올바른 수행의 힘으로써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잘 제거하여 마음의 고요함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평화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윤회의 거센 파도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기쁨과 자유로움을 그는 이웃과 더불어 나누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곧 다음의 게송 두 편을 읊으시었다.

비록 많은 경전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 수행하지 않으면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나니
수행자로서의 아무런 이익이 없다.
 
비록 경전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담마를 실천 수행하여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없애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번뇌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현재와 미래에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참된 이익,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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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사 약사여래 부처님>


1. 잘 듣고, 잘 이해하는 중요함


흔히 불교 공부의 단계를

문(聞)-사(思)-수(修)의 3단계나,
신(信)-해(解)-행(行)-증(證) 의 4단계로 이야기합니다.


(聞) 과 해(解) , 즉 듣고 이해해서 아는 것은

불교 공부의 출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성적인 이해와 납득 없이

닦음과 증득으로 나아가서는

바른 수행의 결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  많은 고행자들이 수행의 길에서 방황했던 이유도 
수행과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지성적 납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성적 납득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시행 착오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처님이 제시하신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에 입각하여
듣고 이해하고 납득해서 이러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불교 수행의 길을 갈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곡사 약수 석불 부처님>

   
2. 증득

 

그런데, 듣고 이해하는 것에서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닦음과 증득, 실천과 구현으로 나아가지 않는

들음과 이해가 자신에게 어떠한 유익을 줄까요?


부처님께서는 듣고 이해하는데 머물러 수행에 게으른 사람에 대해
남의 소만 열심히 키우고 세고 있는 목동과 같다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즉, 수행자로서 큰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듣고 이해하는 배움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배움을 실천하고 구현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법구경의 게송대로 수행을 통해서

탐욕과 분노와 무지를 없애고 번뇌를 끊어서 해탈을 이루고
그 해탈의 유익, 수행의 유익을 나와 남이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입만 9단'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앎이 자신을 진지하고 성실한 실천과 구현의 길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자신의 교만을 더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안다는 아상(我相)만 강화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작은 앎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실천하고 구현하기 위한 진지함과 성실함입니다.

 

수행과 변화를 향한 진지함과 성실함의 가치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