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1)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 - 고뇌>
1. 탄생
원효 대사.
'원효(元曉)'라는 법명은 근원(원), 새벽(효) 자입니다.
원효 대사는 그 이름처럼 우리 한국 불교의 새벽을 밝힌 큰 스승입니다.
원효 대사의 성은 설(薛)씨요, 원효는 법명이며, 어릴 적 이름은 서당이었습니다.
원효 대사는 617년(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지금의 경북 경산시) 불지촌(佛地村)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요, 내마(벼슬 이름) 담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탄생지인 불지촌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근방입니다.
이 곳에는 신문왕 당시에 원효 대사가 지었다는 절터가 남아 있고
그 밑 골짜기에 원효 대사의 아들 설총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학계에서는 원효 대사의 탄생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효 대사의 집은 율곡(栗谷),
곧 밤나무 숲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원효 대사의 어머니가 해산달이 가까와 남편과 함께 골짜기를 지날 때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어 놓고
그 아래에서 출산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룸비니에서 무우수 나무에서 출생한 설화와 유사합니다.
2. 출가
아무튼 소년 시절 원효 대사는 화랑의 무리에 속하여
몸과 마음을 연마하고 각종 전투에도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낭도 생활을 그만두고 불교 공부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 대사는 자신의 집을 헐어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세우고,
31세인 648년(진덕여왕 2년)에 황룡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원효 대사는 타고난 총명을 바탕으로
각종 불경을 섭렵하면서 수도하였습니다.
3. 배움
기록에 의하면 원효 대사는 여러 스승으로부터 불법을 배웠다고 전합니다.
원효 대사는 고구려에서 망명하여 백제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와 있던
보덕 화상에게서 <열반경>, <유마경>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통도사가 있는 양산의 영취산 혁목암에서
낭지 화상으로부터 <법화경>을 배웠다고 하며,
또한 신라 10분의 성인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혜공 화상으로부터 사사받았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아무튼 출가후 일정한 스승을 모시지 않았지만,
여러 곳을 만행하며 수많은 스승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
진평왕은 신라 26대왕으로 선덕 여왕의 아버지입니다.
신라는 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며
불교를 국교로 삼고 군사력을 길러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원효 대사가 태어난 해인 617년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지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신라는 진흥왕 때 고구려로부터 망명한 혜통을 국사로 모시거나,
'세속5계'로 유명한 원광 법사나 신라 율종을 성립시킨 자장 율사 등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 새로운 불교 경전을 가져오고 불교적 기틀을 잡았습니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통치 이념으로 불교를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신라야말로 과거 칠불이 불법을 널리 펼친 불국토라는 설과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여러 불상들과 경주의 절 터를 보면 불국토의 염원을 알수 있슴),
신라 왕족들의 이름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혈통의 이름으로 명명한 점,
(왕족의 이름에 백반,정반,곡반의 이름을 붙이고, 왕비의 이름을 마야라는 칭호를 사용)
미륵 신앙과 결합된 화랑 제도 등이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적용시킨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원효 대사가 태어난 시기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불교가
신라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이면서
삼국 통일을 향한 열망으로 불타는 신라가
활발하게 대외 정복 전쟁을 펼쳐나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원효 대사가 출가한 나이는 31살로 늦은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그 이전의 행적을 보면 화랑의 낭도로서 수련하다면 전투에도 참여했을 것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어린 화랑의 전투 이야기가 여럿 나옵니다.
진흥왕 때 대가야를 차지하기 위해
영웅적 전투를 벌인 화랑 사다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 계백 장군과의 황산벌 전투에서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한 17살 화랑 관창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년들조차도
무모할 정도로 전쟁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러한 신라의 통일 전쟁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은
남자들은 군역이나 부역을 담당해야 했고,
여자나 노인들은 장정 없이 가계를 이끌어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원효 대사도 화랑의 무리인 낭도로서 전투에 참여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전쟁으로 피폐한 민중들의 고통과 비극을 보며
자신의 인생과 시대에 대한 큰 고뇌에 빠졌을 것입니다.
큰 고뇌가 원효 대사를 불법에 귀의하게 하였고,
그 후에는 출가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원효 대사는 화랑 낭도 생활을 그만둔 후 바로 출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 헐어 절을 세우고 혼자서 독학을 하다가 31살에 출가한 것입니다.
원효 대사는 당시 신라 왕실의 원찰로서 최대 사찰이던 황룡사로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출가후 황룡사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인생의 의문과 갈증을 해소할 공부에 주력했던 것입니다.
원효 대사는 배움과 공부에 대한 엄청한 열정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적국인 백제 땅에까지 가서 보덕화상에게 열반경, 유마경의 가르침을 배웠고
낭지화상, 혜공화상 등으로부터 법화경을 비롯한 다양한 경전을 공부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고뇌와 함께 다양한 불교 경전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며,
불법의 진리를 나의 삶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원효 대사는 스승을 깊이 공경하였으며 법에 대한 태도가 진지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 "낭지 화상편"을 보면
울산의 "반고사"라는 절에 머물던 원효 대사가
낭지 화상께 법화경을 배운 후의 행적에 대해 나옵니다.
원효 대사는 자신이 배운 법화경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초장관문> <안심사십론>이라는 2편의 글을 지어
영취산에 머물던 스승인 낭지화상에게 바치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서쪽 계곡의 사미는 동쪽 봉우리 상덕께서 계신
높은 바위 앞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립니다.
작은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며
미미한 물방울을 용연(울산 태화강)에 실어 보탭니다."
자신을 "사미"로 낮추고,
자신이 지은 글을 "작은 먼지"로 표현하며
아주 겸손하게 스승에 대한 공경과 함께 예를 갖추고 있슴을 알수 있습니다.
항간에는 원효 대사는 어떠한 스승에도 얽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며
혼자만의 독학으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법을 구하기 위해 발로 뛰며 여러 스승께 배웠슴을 알수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어느 한 경전에 천착하지 않고,
총 99부 24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신라에 전래된 다양한 불교 경전을 공부하며
불법의 진리에 대한 의문과 배움을 위해 여러 스승들을 구하며
발로 뛰어 다니며 열심히 공부에 정진한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불교 인물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 인물사(5)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5) - 무애 (0) | 2024.03.06 |
---|---|
불교 인물사(4)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4) - 파계 (0) | 2024.03.02 |
불교 인물사(3)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3) - 회향 (0) | 2024.02.29 |
불교 인물사(2)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2) - 해골물 (0) | 2024.02.27 |
불교 인물사를 시작하며 (0) | 2024.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