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4)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4) - 파계>
원효 대사는 붓을 던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에 충격을 던지는 파계를 행하게 됩니다.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로
백제와의 싸움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로 홀로 살고 있던 20대 초반의 요석 공주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어느날 원효는 미친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가 찍으련다."
태종 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원효가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하는구나.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왕은 궁리들를 보내어 원효를 모셔오게 하였다.
궁리들은 '문천교'라는 다리에서
원효를 만나 대궐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원효는 일부러 다리 가운데 떨어져서 옷을 물에 적셨다.
그래서, 궁리들은 하는 수 없이
요석 공주가 있던 요석궁으로
원효를 모셔 옷을 말리게 하였는데,
이후 요석 공주가 잉태를 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으며,
후일 한문으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독특한 이두 문자를 만들어
신라 10현(賢)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삼국유사> *******
파계였습니다.
파계 이후 원효 대사는 승복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를 "소성(小姓) 거사"로 자칭하며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무애행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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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권
원효 대사는 당시 왕실과
귀족 중심의 특권화된 불교 속에서
어떻게 민초들의 곁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민초들에게 들어가 어떻게 이들의 곁에서
보살행을 펼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 공인된 불교는
처음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된 만큼
불교는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족 출신의 승려들은
왕실과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왕궁 주위에 큰 사찰이 세워지고
그 사찰에는 토지와 함께 노비가 하사되었습니다.
귀족의 자제들이 출가하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 유학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귀족 출신의 승려들과 중국 유학승들은
왕족들과 귀족들이 세운 큰 사찰에 머물며
왕실과 귀족을 대상으로 하여 설법하며
많은 혜택을 받으며 선택된 승려의 길을 갔습니다.
일부 엘리트 승려들은
때로는 현실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2. 민중
그런데, 민중들의 삶의 조건은 피폐하였습니다..
7세기 들어 삼국 간의 전쟁은 국운을 건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민중들은 지쳐가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의 붕괴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남자(장정)들은 군대에 가는 군역을 담당하거나,
또한 때로는 공사에 동원되어 부역을 행해야 했습니다.
남자(정정)들이 떠난 집에는 농사짓는 사람도 부족하여
여자, 노인, 어린아이가 농사를 짓는 때가 많았습니다.
민중들은 고통 받으며 구원에 목말라했으나,
이들에게 자비로운 부처님의 법음은 널리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 민중들과
함께 하는 승려들이 차츰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는 스님 중에
'대안(大安)'이라는 승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자 거리에서 민중들을 만나면
"대안(大安, 크게 평화로워라)"하고 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대안' 한마디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던 대안 스님의 이야기는
신라 사회가 오랜 전시 상황을 통해서 불안과 두려움이 많았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귀족 출신 승려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며 중생 제도를 게을리하였으며,
민중들과 함께 하려는 일부 승려가 등장했지만 일반 민중들은 교화에 목말라했습니다.
원효 대사의 파계는 이러한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려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의도적인 파계로 생각됩니다.
3. 파계의 의미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와의 관계는
<삼국유사> 기록만으로는 그 정황을 소상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신라와 같이 엄격한 골품 신분제 사회에서
아무리 과부라고 하지만 왕의 딸인 공주를
6두품 출신이자 승려인 원효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요과 논소로써 명성을 떨치던
원효 대사가 궁궐로 들어와 자주 설법을 했고,
요석 공주가 원효 대사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 요석 공주의 마음을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과
당사자인 원효가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효 대사는 민중들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재가의 몸으로 동사섭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재가의 길로 가는 방법도
그냥 얌전히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는 방법이 아닌
공주와의 관계를 통한 파계라는 충격적 변신을 통해 다가갔던 것입니다.
후일 원효 대사는 보살계에 대한 저술인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계율의 조문만을 형식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천박한 지식으로 여기고,
"경우에 따라 복과 죄가 다를 수 있슴을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계율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하며
동일한 행위라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을수 있다는 입장에서 계율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효 대사는
1) 오랫동안 한적한 곳에서 참선을 하여 어떤 착각을 얻게 되어
스스로 성자로 자처하며 명리를 얻고자 남을 억누르는 탐욕스러운 자들,
2) 깊은 산 속에 묻혀 마음의 고요만을 얻기 위해
수행을 일삼다가 교만해져서 남을 억누르고,
특히 저자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속세에 사는 이를 비난하는 자들,
3) 계율을 지키며 저 혼자 잘난척 하며 남을 비난하는 자들 과 같이
잘못된 승려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다음과 같이 강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불도를 닦는 척하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과 명예와
남의 존경을 탐하고 구하는 무리들은 자기를 추켜세우고 남을 헐뜯는다.
이들이야말로 '사자 몸 속의 벌레'와 같이 불교를 안으로부터 파괴하는 자들이다"
위선적인 승려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면에서
원효 대사의 파계행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원효의 파계는
당시 기존 승단에는 큰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원효 자신도 스스로 하찮은 존재라는 뜻의 "소성 거사"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거사의 모습으로 민중들 곁으로 나아가 자신의 깨달음을 회향하려 했던 것입니다.
원효 대사에서 소성 거사로 변신한 그 이후부터
원효 대사는 걸림없는 무애의 중생 교화의 대도를 새롭게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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