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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금강경(20)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1 -의문

by 아미타온 2024. 3. 1.

<금강경(20)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1 -의문>

 

<낙산 동해 바다>

 

제7분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얻은 것도 설한 것도 없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느냐?

또한 여래가 내린 가르침이 있느냐?"

  수보리 존자가 대답했다.

"적어도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위없는 깨달음이라 불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이란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르침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깨닫고 설하신 가르침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 생각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여래의 가르침은 자존(自存)하는 것도 아니며, 자존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인(聖人)들은 무위법(無爲法)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낙산 솔비치 - 배>

1. 의문

 

제7분의 제목은 "무득무설(無得無說)"분입니다.

 

"얻은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은 것도 없고,

무엇을 설한 것도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은 것도 없고,

가르침(법)을 설한 바도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제 5분에서 부처님은 거룩한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부처라고 집착하는 형상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깨닫는 것이 부처라고 하셨고, 

형상 속에는 부처라고 할만한 그 어떠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 6분에서는 부처님은 법(法)이라고 고집하는 법상과,

법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비법상(非法相)에 대한 집착을 깨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과 같이 여기고,

강을 건너면 놓아 두고 떠나야 할 것이라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처럼 형상에 집착하여 부처님을 보지 말라는 가르침과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보리 존자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습니다.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법이라 할 것도 없는데,

도대체 부처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얻으셨고,

어떻게 법을 설하셨는가?'

 

 

<바다>

 

제 7분은 이와 같은 수보리의 의문에 대한

부처님의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 <금강경>은 제 7분을

'실체의 바다에 들어가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할 독립된 어떠한 실체나,

법이라고 할만한 분명한 실체가 과연 있는가?

 

그러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실체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와 같이 이름 붙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 7분을 차근히 살펴볼까요?

 

<동해 바다>

2. 단도직입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과연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느냐?

또한, 여래가 설한 바 가르침(법)이 과연 있는 것이냐?"

 

 

부처님은 수보리 존자의 이러한 의문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과연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었는지

또한 과연 부처님이 설한 바 가르침이 과연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수보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