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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금강경(21)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2 -없슴(무)

by 아미타온 2024. 3. 4.

<금강경(21)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2 -없슴(무)>

 

<원주 거돈사지>

 

수보리 존자가 대답했다.

"적어도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위없는 깨달음이라 불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이란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르침이란 없습니다.

 

<거돈사지 부도탑>

 

1. 무(無)

 

<부처님의 생애>를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 고행 끝에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5비구에게 초전법륜을 설하신 이후로

사리불, 목건련 등의 많은 출가 비구들과

빔비사라왕, 위제희 왕비 등을 비롯한 많은 재가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이후 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길에서 길로 다니시며 진리를 구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전법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고,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수보리 존자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질문을 던지신 의도가 

이와 같은 객관적 사실을 물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흔히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는 사람을 "사오정"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은 '현명한 질문에 어리석은 답(賢問愚答)'인

사오정 같은 답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질문이라도 현명한 답변(愚問賢答)'이

나오는 사려 깊은 답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주 거돈사지>

 

2. 방편

 

서울이라는 목적지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부산, 강릉, 인천과 같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서울이라는 목적지로 오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서울 가는 길은 북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고정되고 획일적인 길을 제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천에서 오는 사람은 북한으로 가버릴 것이고,

강릉에서 오는 사람은 러시아로 가버릴 것입니다.

 

또한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걸으며 경치를 감상하려는 사람의 요구와는 어긋날 것입니다.

 

이처럼 고정되고 획일화된 길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해탈'이라는 목적지로 가는 수행의 길은

다양한 사람의 근기와 욕망에 따라

다양한 방편으로 제시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깨달음과 가르침도

"반드시 이것, 고정된 무엇"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색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참선이 최고법이 아니라,

보시가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역 금강경 본문에는

"무엇이라고 정할 바가 없는 법(무유정법 無有定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없는 깨달음)이라고 하셨고,

이렇게 무엇이라고 정할 바가 없는 무유정법을 부처님께서 설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 대목을

"위없는 깨달음이라 불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이란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르침이란 없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질문 의도가

이와 같은 '깨달음'의 상, '가르침'의 상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것도,

설법을 하신 바도 없다는 답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돈사지>

 

3. 나뭇잎

 

<아함경>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울창한 숲 속에서 땅에 떨어진

나뭇잎 몇 개를 쥐시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손에 쥔 이 나뭇잎과 이 숲 전체의 나뭇잎 중 어떤 것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손 안에는 단지 몇 장의 나뭇잎이 있을 뿐이며,

숲 전체에는 엄청난 양의 나뭇잎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설법한 것은 나의 깨닫고 알고 있는 세계에 비하면 

내가 쥔 나뭇잎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아함경>의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생생한 체험과 깊이에 비교한다면

언어로서 표현되어 설법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니 

실제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적으로 바라보자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깨달은 법이란 밝은 거울과 같아서

모든 중생들의 모습에 따라 비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밝은 거울은 한 사람 한 모습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다양하게 비추고 한없이 많은 이들을 비출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이나 가르침은

이 밝은 거울처럼 상(相)이 없기 때문에

울창한 숲의 나뭇잎과 같이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해탈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