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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 성지 순례

중국 불교 성지 순례(9) - 구마라집 법사 혀 사리탑, 서안 종남산 초당사

by 아미타온 2024. 3. 17.

<중국 불교 성지 순례(9) - 구마라집 법사 혀 사리탑, 서안 종남산 초당사>

 

<초당사>

 

1. 요진 삼장, 구마라집 법사

 

종남산 규봉 아래의 초당사.

 

초당사는 서역 출신의 뛰어난 역경승인

구마라집 법사(AD344~413)가 머물며

10여년 동안 역경 사업을 했던 곳입니다.

 

우리가 독송하는 법화경, 아미타경, 금강경 등의

많은 경전들은 1700년 전 지난 오늘도 구마라집 법사의

번역본을 독송하고 있을 정도로 구마라집 법사는 천재적인 역경승입니다.

 

<초당사 대웅보전>

 

중국 출신이 아닌 서역 쿠차국 출신으로

중국어를 배워 이와 같은 번역을 하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조국이 망하고 강제로 파계당하는

비운의 삶을 사셨지만, 그 힘겨웠던 삶을 고스란히

경전 번역에 집중하여 온전히 불법으로 회향하신 훌륭한 스님입니다.

 

초당사의 구마라집 법사 사리탑에 가면

구마라집 법사를 '요진 삼장'이라고 부릅니다.

 

5호 16국의 중국 혼란기에

'요진'이라는 북방 민족 국가를 대표하는 

경율론 삼장에 능통한 법사라는 뜻입니다.

 

<초당사 경내>

 

2. 구법의 열정

 

구마라집 법사가 왜 불법에 달통한

삼장 법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법을 구하는 구법의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쿠차국에서 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유학한 유학파 법사입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아버지는 인도에서 온 유명한 학승이었고,

어머니는 서역 쿠차국의 공주였다고 합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장성한 후 아버지는 인도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출가하여 비구니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구마라집 법사에게 인도에 가서 불법을 배워서

세상에 불법을 널리 펼치는 법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구마라집 기념관>

 

3. 대승의 법사

 

어머니의 권유로 인도에 유학간 구마라집 법사는

처음에는 '설일체유부'의 소승 불교를 공부했지만,

나중에 대승으로 전향하여 특히 공(空) 사상에 달통한 대승 법사가 되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대승으로 전향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승의 가르침을 몰랐을 때는 소승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마치 황금을 모르는 자가 놋쇠를 보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구마라집 법사는 대승 불법의 훌륭함을 자각하고

대승 불법을 구하고 대승 불법을 공부하는데 정진하여

서역(실크로드) 제일의 대승 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 법사에게 소승법을 가르쳤던 스승은

제자가 대승법을 선양한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인 구마라집 법사와 공성(空性)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논쟁에서 대승법의 진면목을 알게 된 스승은 구마라집 법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소승의 스승이나,

너는 나에게 대승의 스승이다."

 

<호법 신장>

 

4. 전란과 파계의 고난

 

그런데, 구마라집 법사가 살았던 시절,

중국은 북방 유목 민족이 쳐들어온 전란과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구마라집 법사의 명성을 들은 중국 전진의 황제 부견은

군대를 보내어 쿠차국을 정벌하고

구마라집 법사를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자신의 조국이 멸망하는

가슴 아픈 장면을 직접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벌 온 중국의 장군은

구마라집 법사를 환속하여 데려가기 위해

강제로 여인과 합방하여 파계하게 하였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이와 같은 역경과 수모 끝에

중국으로 잡혀 왔습니다.

 

어학의 천재였던 구마라집 법사는

중국에서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하며

10여년간 중국어를 배워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대자전(大慈殿)>

 

5. 경전 번역 사업

 

나중에 중국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자

황제는 구마라집 법사로 하여금

인도말로 되어 있는 많은 불교 경전을

중국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중국 황제는 구마라집 법사의 번역 작업에 국가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의 제자를 포함한 800명의 역경승들이 역경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약 10여년간 초당사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초당사 대자전>

6. 구마라집 법사의 번역의 특징

 

그런데, 구마라집 법사의 번역은 독특했습니다.

 

구마라집은 먼저 제자들에게 인도말로 된 경전을 중국어로 설법했습니다.

그 설법을 통해 경전의 바른 의미를 제자들에게 이해시켰습니다.

 

그리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한 구절 한 구절을 번역해 나가고

9단계를 거쳐 문장을 가다듬고 오역을 줄여 나갔습니다.

 

인도 원전의 원형을 손상하더라도 번잡한 반복어와

같은 주제에 대해 중언 부언하는 것을 과감히 제거하여

간결하면서도 경전의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언어 감각에 맞추어 문장을 가다듬고 재구성하면서

중국인들의 사유 구조에 맞게 심금을 울리는 문장을 찾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기존의 번역가들에 비하면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해석을 가미한 번역이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의 제자인 승조 대사

기존 역경에 비해 스승의 번역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문장은 간결하나 뜻이 깊고,

원문의 본래 뜻이 은근하나 또렷하게 드러나니,

미묘하고도 깊은 부처님 말씀이 여기서 비로소 확실해졌다."

 

<초당사 전각>

 

7. 구마라집 법사의 고뇌

 

이렇게 훌륭한 번역을 했어도

구마라집 법사는 인도 원전을

중국 한문 경전으로 역경하는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인도의 풍속은 문장의 운율과 문채(文彩)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이 현악기와 어울리듯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 법사는 이처럼 번역의 어려움을 통감했으면서도

다른 언어로 경전을 읽는 후학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깊은 자비심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번역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구마라집 법사는

반야경, 금강경, 법화경, 아미타경, 미륵경, 유마경의 경전과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의 논서를 비롯한 수많은 경론을 번역했습니다.

 

<대자전의 관새음보살님>

 

8. 제자 양성

 

그리고, 구마라집 법사는 경전 역경 사업을 통해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내는 노력을 줄기차게 하셨습니다.

 

구마라집 법사에게는 3,000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승조, 승예, 도생, 도문의 4명의 훌륭한 제자를

‘습문사성(聖, 구마라집 문하의 뛰어난 네 성인)'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스승이 번역한 <중론>에 대한 해설집인 <조론>을 저술하여

중국 삼론종의 실질적인 개조가 된 승조 대사

모든 중생들이 성불할 수 있다는 의문을 <열반경>의 불성을 통해

새롭게 해석해 낸 중국 열반종의 개조 도생 대사가 유명합니다.

 

서역 출신의 구마라집 법사는

한족 출신의 훌륭한 제자들을 잘 키워 내어

중국 불교 라는 정원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기념비>

 

9. 유언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10년간 경전을 번역하고,

제자들을 양성한 구마라집 법사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역경을 맡았고,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번역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 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내가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 맹세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 유언처럼 구마라집 법사를 화장한후

혀만은 타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지금도 초당사에는 구마라집 법사의

혀 사리탑이 남아 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의 역경에 임한 큰 자비와 전법의

마음 세계를 잘 읽을 수 있는 유언입니다.

 

<구마라집 법사 혀 사리탑>

 

10. 구마라집 법사의 공덕

 

초당사는 이와 같이 고난의 역경 속에서도

불법을 전하고자 하는 깊은 자비와 소명의식 속에서

경전을 번역한 구마라집 법사의 법향을 느낄 수 있는 도량입니다.

 

구마라집 법사의 공덕으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당시 한자를 공용어로 했던

동아시아의 많은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사유 체계 속에 납득하고 소통할수 있는 통로를 갖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번뇌즉보리>

 

11. 번뇌즉 보리

 

구마라집 법사 사리탑 전각에는

'번뇌즉 보리'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의 삶은 고난과 번뇌 속에 굴하지 않고

연꽃을 피워낸 '번뇌즉보리'의 삶이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타의에 의한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받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 속에서도

'경전 번역'과 '제자 양성'과 '불법 전파'라는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었던 훌륭한 분입니다.

 

우리 삶의 반 이상은 타의에 의해 끌려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국가 경제가 어려워져 회사가 부도나면 직장을 잃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으면 나의 행복이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이러한 타의에 의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이 우리 인생입니다.

 

<초당사 전각>

 

12. 자기 운명의 주인

 

그러나, 타의에 의해 살아가는 삶에

부초처럼 떠다니다 희노애락을 윤회하는 삶이 아닌,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꿋꿋하게 살아가신 전형이 구마라집 법사입니다.

 

전란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었고,

권력에 의해 파계와 굴욕의 삶을 강요받았지만,

이 생명 다하도록 법사로서 불법을 전해야 한다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의미 부여가 확고했기 때문에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대승의 법사로서의 삶을 사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을 향한 뜨거운 구도 열정과 함께

그 열정을 구현하기 위해 길을 개척하는 역동적인 도전,

그리고, 자신이 구한 법을 중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초당사와 종남산 규봉>

 

 

이와 같이 훌륭한 구마라집 법사가 바로 이 곳에서

우리가 독송하는 많은 경전들을 번역했다는 법향을 느끼며

감격에 젖었던 곳이 바로 초당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