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불교 성지 순례(11) - 밀교 종찰, 서안 대흥선사>
1. 중국 밀교 근본 도량 대흥선사(大興善寺)
오늘은 중국 밀교 근본 도량 서안 대흥선사입니다.
대흥선사는 중국 진나라 때인 265년에 창건된
장안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의 사찰입니다.
265년이면 삼국지 조조,유비,손권의 위촉오 삼국이 끝나고
사마염에 의해 통일된 진나라 시대이니 정말 오래 전입니다.
중국 밀교는 당나라 고종에서 현종 치하에 꽃을 피웠습니다.
AD 650~750년의 약 100년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 밀교는 쇠락하여
중국 밀교 근본 도량인 대흥선사에
중국 밀교 고승들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절 입구에는 두개의 현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체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뜻의
'이락유정 국토장엄(利樂有情 國土藏嚴)'이라는 현판입니다.
또 하나는 '밀교의 종풍을 간직한다'는 뜻의
'밀장종풍(密藏宗風)'이라는 현판입니다.
밀교는 대승 불교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금강저
절 입구에는 거대한 금강저가 있습니다.
금강저는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
번개인 금강저로 아수라를 쳐부순다는 데서 유래한 무기입니다.
밀교에서 모든 번뇌를 부수는 단단한 금강심을 상징하는 지물로
밀교의 고승들은 금강저를 잡고 수행하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오늘날 밀교의 교세가 강한 나라는 일본입니다.
우리 나라 원효 대사만큼 추앙받는
일본 밀교의 고승인 공해(쿠카이) 스님은
대흥선사 근방의 청룡사에서
불공 화상의 제자인 혜과 스님으로부터
밀교를 전수받아 일본 밀교 진언종을 개창했습니다.
예전에 일본 고야산 박물관에 갔을 때
금강저를 쥐고 있는 밀교 행자 쿠카이 스님의
당당한 모습이 저 거대한 금강저를 보니 떠올랐습니다.
밀교에서 진언을 외며 수행하는 진언 행자는
쿠카이 스님처럼 금강저를 잡고 수행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금강과 같은 지혜가 가지(加持)되어
능히 자기 마음속의 어리석은 망심을 소멸시켜
자기 심성의 청정한 지혜 광명을 발현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금강저입니다.
금강저를 보면서 중국 밀교의 거장을 생각했습니다.
밀교는 중국 당나라 때 인도에서 넘어온 최첨단 불교였습니다.
중국 황제들에게는 신비로운 주술과 기복과 위신력의 불교로,
불교 수행자에게는 '즉신성불', '현생성불'의 이상을 꿈꾸게 한 밀교였습니다.
우리나라(신라)의 명랑, 혜통, 혜초를 비롯해
일본의 쿠카이, 사이초, 엔닌 등
신불교의 참신함과 보리심의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켰던
중국 밀교 거장들의 법력이 저 대형 금강저로 상징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천왕문과 명량법사
대흥선사 도량은 상당히 크고 넓습니다.
대흥선사를 크게 중창한 인물은 수나라 문제입니다.
수나라 문제가 혼란기의 중국을 통일하고 난 후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고 '대흥성(大興城)'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대흥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명나라 때 축조된 오늘의 서안성입니다.
지금의 서안성보다 8배가 넓었던 것이 수, 당 시대 장안성입니다.
대흥성에서 가장 큰 절이 대흥선사였습니다.
유목 민족 선비족의 후예였던 수와 당의 황제들은
바둑판처럼 조(條)와 방(防)을 만들고 방에 백성들을 살게 했습니다.
그 당시 대흥선사는 하나의 방을 차지할 정도로 큰 도량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같으면 서울 종로구의 한 동(洞) 전체가 다 대흥선사였던 것입니다.
당나라 때 인도에서 밀교를 전한 승려는 금강지와 불공 화상입니다.
금강지와 불공 화상이 주석하면서
금강계 밀교 경전을 번역하고 밀교를 포교한 도량이 대흥선사입니다.
대흥선사는 가람 배치가
천왕전 - 대웅보전 - 법당(강당) 식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대흥선사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사대천왕을 모신 거대한 천왕전과 만납니다.
거대한 천왕전을 보니
우리 신라의 밀교 승려인 명랑 법사가 생각납니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자
당나라는 한반도를 다 먹어 삼키기 위해 신라를 침임했습니다.
당나라의 침입으로 국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라에서는 장안에서 선무외에게 밀교 행법을 배운 명랑 법사가
경주 사천왕사에서 4천왕의 힘을 빌어 문두루(만트라) 행법으로 기도를 하자
큰 풍랑으로 당나라 수군이 수몰하여 싸우지도 않고 승리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유학 시켜주고
밀교 가르쳐 준 은혜를 원수로 갚은 택이 되겠지만,
정말 당나라에서 제대로 밀교 행법을 배워온 명랑 법사입니다.
대흥선사의 가장 중심 전각은 대웅보전입니다.
대웅보전에는 오방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중앙의 대일 여래를 중심으로
아촉불(동), 아미타불(서),
보생불(남), 불공성취불(북)의 5불이 나란히 앉아 계십니다.
즉, 동서남북중 그 어디에도 부처님은
항상 중생들과 함께 하며
중생들을 구제해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4. 중국 밀교의 역사
밀교는 잡밀(雜密,잡부밀교)과 순밀(純密, 순수밀교)로 나눕니다.
잡밀은 초기 불교 이래 단편적으로 전해 내려온
주술과 의례를 가리킵니다.
순밀은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소의 경전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설해진 밀교입니다.
옛날에는 농사철에 비가 오지 않을 때
비를 내리는 기우제를 해서 국가 경제를 구하거나,
명랑 법사처럼 전란에서 적군을 무질러 승리를 거두는데 유용한 밀교 주술 행법이
황제를 비롯한 지배자들에게는 가장 선호되는 불교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인도 여행기로 유명한 신라의 혜초 스님도
대흥선사에 주석하며 신통력이 뛰어난 밀교 스님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혜초 스님은 당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선유사'라는 절에서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 <대일경>과 <금강정경>같은
밀교 경전을 중심으로 즉신성불을 수행하던
순밀 밀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7세기 중엽부터입니다.
인도에서 온 밀교 승려인
선무외, 일행, 금강지, 불공 화상 등의 승려들이
당 고종, 측천무후, 당현종의 시대 때 체계적인 순수 밀교를 전파했습니다.
7세기 중엽 인도 또한 나란다 대학을 중심으로
밀교의 교세가 강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때는 중관 불교, 유식 불교가 궁극을 추구해 나가면서
부처님의 일체지와 경험적 인식을 초월한 직관을 추구하며
밀교가 인도 불교의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무렵이었습니다.
5. 선무외 화상과 일행 스님
중국으로 건너온 밀교의 첫 주자가
바로 선무외(637~735) 화상입니다.
선무외 화상은 제자 일행(一行)과 함께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이라고 하는 <대일경>을 번역하고
그 논서를 씀으로 중국에 최초로 '태장계 밀교'라는 밀교를 전했습니다.
<대일경>은 대일 여래가 설법한 경전인데,
불.보살.명왕,천부를 계통적으로 배열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만다라' 라고 불리는 판테온의 그림을 제작합니다.
당시 중국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던
불보살상을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통일되고,
각각의 상에 대해 자세한 규정이 명확하게 확립되어
불상의 제작도 엄밀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선무외 화상은 관정(灌頂) 의식을 중국에 전했습니다.
관정 의식의 유래는 인도에서 왕의 즉위 때 머리에 물을 붓는 의식입니다.
밀교에서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비법을 전수하는 의례로 만들었습니다.
인도식의 관정 의식이 당 현종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무외는 많은 밀교 경전을 번역하고 고향 인도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 현종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선무외는 98세에 고령으로 입적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제자가 바로 일행(683~727) 스님입니다.
일행 스님은 뒤에 금강지에게도 사사 받아 관정을 받았습니다.
선(禪)과 율도 배웠고, 수학과 역법에도 정통해서
종례의 달력 계산법을 정정해서 <대연력>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다방면의 뛰어난 천재였던 일행 스님은
44세 때 애석하게도 스승인 선무외보다 먼저 입적했습니다.
6. 금강지와 불공 화상
대흥선사에 주석했던 유명한 밀교 조사가
바로 금강지와 불공 화상입니다.
금강지(671~741)와 불공(705~774)은
30살 터울의 스승과 제자입니다.
두 분은 중국으로 올 때부터 스승과 제자였다는 설이 있고,
중국 장안에서 만나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금강지는 720년부터 741년까지 낙양과 장안에 머물면서
<금강정유가중락출염송경> 등의 금강계 밀교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계자가 인도 이름으로 '아모가 바즈라(불공 금강)',
중국 이름으로 '불공(不空) 화상'입니다.
불공 화상은 720년에 낙양에 도착하여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741년 스승 금강지가 입적한 후
스리랑카로 돌아가 그곳 국왕의 도움으로
다수의 밀교 경전을 수집하고 그 사이에
'용지'라는 스승으로부터 밀교 행법을 전수받았습니다.
746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750년 다시 인도로 가서 경전을 구하려고 했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중국에 머물러 28년간 80부 이상의 밀교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그 중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형중대교왕경> 3권은
금강계 밀교의 근본 경전으로 <금강정경>이라고 불립니다.
불공 화상은 청년 시절부터
중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했습니다.
번역문도 유창하여 구마라집, 진제, 현장, 의정 등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밀교 번역가였습니다.
특히, 밀교의 다라니를 한자로 옮기기 위해
산스크리트어와 한자와의 엄밀한 음운의
대응 조직을 확립한 것도 불공 화상의 큰 공적입니다.
또한 밀교의 신비적인 교리, 주술적인 효과,
천문, 점성술에 대한 지식 등으로
당나라 조정에서 불공 화상의 신임은 두터웠습니다.
755년 안록산의 난으로 낙양과 장안이
한 때 반란군의 손에 넘어 갔습니다.
불공 화상은 안록산의 난이 평정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대흥선사에서 재난을 물리치는 행법을 행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안록산은 무너지고,
현종은 아들 숙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는데,
불공 화상은 숙종과 그 아들인 대종(代宗)까지도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불공의 포교 활동은 낙양과 장안 등 궁성 주변뿐만 아니라,
산서성의 오대산을 밀교 수행 중심 도량으로 경영하는데도 나타났습니다.
오대산은 영산으로 이름이 높았고,
6세기 중엽부터 불교 성지로서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는데,
불공은 오대산에 금각사와 옥화사를 지어 밀교 도량으로 정비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불공 화상은 그의 칠십 생애 대부분을 중국에서 밀교를 위해 바쳤습니다.
불공 화상은 인도와 중국을 오가며 정력적으로 밀교를 포교한 전법승이자,
우리가 천수경, 반야심경의 다라니와 진언을 독송할 수 있도록 한자로 번역한 역경승이자,
장안과 오대산에 각기 포교와 수행을 할 수 있는 도량을 건설한 안목 있는 밀교승이었습니다.
7. <왕오천축국전>을 쓴 밀교승 혜초 스님과 대흥선사
불공 화상의 제자 중에는 6명의 중요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장안 청룡사에 주석했던 혜과(746~805)였습니다.
혜과는 그가 입적하기 한 해 전
일본에서 온 쿠카이(空海) 스님에게 밀교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혜과 스님의 밀교는 일본에 전해 졌습니다.
한편, 대흥선사는 우리 한국 불교와도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신라10성 중의 한 분으로 홍륜사에 그 영정이 봉안된
안함 스님이 중국 수나라 유학 때 대흥선사에 머물면서
불법을 배우고 수많은 경전을 갖고 신라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704~780) 스님이 있습니다.
혜초 스님도 대흥선사에 머물면서
불공 화상에게 밀교를 배웠습니다.
혜초 스님은 16살 때 신라에서
중국 광동성 광조우로 불교 유학을 떠났습니다.
중국 남쪽 광조우에서 금강지와
불공 화상을 만나 4년간 밀교를 배웠습니다.
그 때 인도에서 온 스승 금강지 스님은
혜초에게 인도 여행을 권유했습니다.
직접 인도로 가서 부처님의 유적이 남아 있는
불교 성지 순례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20대 초반의 혜초 스님은 스승 금강지의
가르침대로 인도 성지 순례를 했습니다.
붓다가야, 쿠시나가라 등 8대 성지를 순례하고 때로는 감격에
때로는 성지가 파괴된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혜초 스님은 단순히 인도 성지 순례만 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여행에 엄청난 재미를 붙였습니다.
당시 인도는 동,서,남,북,중의 5군데 천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기 다른 문화와 풍토의 5천축국을 다 돌면서 여행을 통해 공부했습니다.
혜초 스님은 인도 뿐 아니라 옛 페르시아 지방인 이란까지 도전했습니다.
무려 4년이나 인도, 파키스탄, 이란, 아프카니스탄을 여행하며 공부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만행(萬行)을 한 것입니다.
여행을 통해 성숙해진 20대 후반의 혜초 스님은
장안으로 돌아와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쓰고
스승인 금강지, 불공 화상과 조우하여 대흥선사에서 밀교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불공 화상은 자신의 제자 중
두 번째로 뛰어난 제자로 혜초를 지목했습니다.
혜초는 그 정도로 인정 받던 뛰어난 스님이었으며
말년에는 스승 불공 화상이 오대산에 건립한
밀교 수행 도량에서 밀교 행법을 닦고 공부하며 입적했다고 전합니다.
밀교를 잘 하려면 혜초처럼 목숨 걸고 새로운 것을 실행하는 결단력,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역동적인 도전심, 모험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쉽게도 오늘날 대흥선사에는
불공 화상과 혜초 스님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교 교세가 강한 일본 천태 밀교의 3대 조사인
자각대사 엔닌 스님의 기념비를 이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나라 말기 무종의 훼불로
가장 큰 법난의 피해를 입은 불교 종파가 밀교입니다.
법란으로 밀교의 창의적 전통이 중국에서는 끊어지고,
오히려 일본에서 밀교가 생명력을 갖고 화려하게 꽃피웠습니다.
아무튼 우리 나라 신라의 혜초 스님도 바로 이 곳
대흥선사에서 불공화상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해서
그 당시 중국에서 존경받는 밀교 스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20대의 어린 혜초 스님이
고향 신라를 생각하며 남긴 <망향가>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月夜瞻鄕路
뜬 구름은 너울너물 돌아가네 浮雲颯颯歸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緘書沗去便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風急不聽廻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我國天岸北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他邦地角西
일남에는 기러기마져 없으니 日南無有雁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誰爲向林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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