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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36) 자신의 몸을 아지랑이로 생각하고마음을 집중시킨 비구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3. 19.

 <법구경(36) 자신의 몸을 아지랑이로 생각하고 마음을 집중시킨 비구 이야기>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강화도 선원사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시던 어느 때,

한 비구가 자신의 몸을 아지랑이로 생각하고

마음을 집중시킨 일들과 관련하여 게송 46번을 설법하시었다.

한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좌선 수행에 관한 설법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수행을 하기 위해 숲에 들어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열심히 수행했지만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초조해진 그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수행 주제가

내게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부처님께 가서 내게 적합한 수행 주제를 다시 받아와야겠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향해 떠났다.

 

그는 길을 가다가 멀리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고 곧 이렇게 생각했다.

 

'저 아지랑이는 더운 여름날 먼 데서 보면 실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실체를 잡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마음이라는 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인연적인 결과이지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을 거기에 집중하며 길을 걸어갔다.

 

그러다가 그는 도중에 매우 덥고 피곤하여

아찌라와띠 강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치고 폭포 옆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폭포에서는 많은 물거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물거품은 물이 떨어지는 힘에 의해서 일어나 잠시 머무는듯 했지만

곧 새로운 물에 의해서 깨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저 물거품 같은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물거품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물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주제로 하여 좌선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강화도 선원사지>

 

이때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의 간다꾸띠에 계시면서

광명과 함께 그 비구 가까이에 모습을 나투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와 같으니라.

인간이란 마치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은 존재이니라.

물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듯이 인간도 태어났다가 사라지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이 몸은 물거품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 같다고 깨닫는 님은

악마의 꽃들을 잘라버리고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

 

부처님의 이 설법을 듣고 그 비구는 즉시 아라한 과를 성취하였고,

곧 부처님을 찾아뵙고 부처님의 거룩하신 능력을 높이 찬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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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1. 유신견(有身見)

 

봄에 피어나는 아지랭이와 폭포수의 물거품을 보고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인연에 따라 변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통찰함으로써 모든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

아라한 과를 증득할 수 있었던 한 수행자의 이야기입니다.

 

수다원 과에 오를 수 있는 첫번째 조건은

"나의 몸과 마음이 영원하다"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왜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에서 벗어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불법의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깨달음의 출발로 중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번 법구경 이야기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무상함을 철견함으써

아라한과까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인생은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갈애와 집착"입니다.

 

그리고, 그 갈애와 집착의 뿌리에는

'에고(ego)'라고 말해지는 ""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갈망을 자신의 노력을 통해

하나 하나 끊어나가는 것도 이고득락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갈애와 집착의 뿌리에 자리잡은 "나"로 들어가서

"나"를 바르게 이해하고 통찰함을 통해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강화도 석모도 보문사지>

 

2.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부처님께서는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연에 따라 몸(色)을 갖고 있고,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의지를 갖고 행동하고(行), 인식하는(識) 정신 작용을 하는 존재가 '나'입니다.

 

그리고, 나의 몸과 마음의 어느 영역,

즉 오온의 색수상행식 각각을 보더라도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법구경의 주인공은 부처님께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상하다는 가르침을 들었지만,

단지 가르침일 뿐 자신의 갈애와 집착을 깰만한

선명한 앎으로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늦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보고,

폭포에서 목욕하다가 폭포수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거품을 보고

나의 몸과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어남의 순간을 맞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깨어남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갔고,

나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왜 갈망과 집착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시스템에 대한 각성에 이르렀습니다.

 

<강화도 보문사에서 바라본 저녁의 서해 바다>

 

3. 이고득락(離苦得樂)

 

'고(苦)'에는 2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고성(苦苦性)입니다.

 

배고픔, 추위, 더위, 병고와 같이 그 자체가 괴로움인 고의 속성입니다.

 

또 하나는 괴고성(壞苦性)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데 헤어져야 하고,

이 몸은 영원히 이팔청춘이고 싶은데 늙고 노쇠해짐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데서 오는 괴로움의 속성입니다.

 

몸과 마음의 무상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의 두번째 속성인 괴고성에서

자신이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도록 해 주는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왜냐하면, 괴고성의 고는 '내'가 가지고 싶고 원하는 것이

영원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봅시다.

 

'나의 몸과 마음도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고 무상한 것인데,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이 영원할 것인가?'

 

이 질문을 밀고 나간다면

'나'에 대한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데서 오는

탐욕, 분노 등의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실타래가 풀릴 수 있습니다.

 

<금강경>의 4구게 중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일체의 '있다'고 하는 법(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햇빛이 나면 말라지는 이슬과 같고

또한 번쩍하는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바라볼지니라.”

 

<금강경>의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번 법구경의 게송과 동일한 맥락의 게송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가르침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갈애와 집착의 시스템의 흐름을 끊어야 합니다.

 

갈애와 집착의 뿌리에 자리잡은

'나'에 대한 바른 사유와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나'라는 뿌리를 잘라버리면

그 뿌리에서 물과 영양분을 받아들이던  갈애와 집착의 꽃이 말라 죽습니다.

 

이와 같은 '나'에 대한 연기적 시스템의 사유를 통해 이고득락에 이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