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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45) 녹자모 강당을 지은 여자 신자 위사카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4. 17.

<법구경(45) 녹자모 강당을 지은 여자 신자 위사카 이야기>

 

<인도의 스투파전(1) - 국립 중앙 박물관>

 

부처님께서 녹자모 강당에 계시던 어느 때,

녹자모 강당을 승단에 시주한 여자 신자 위사카와 관련하여 게송 53번을 설법하셨다.


위사카는 밧디야 지방의 큰 부호인

아버지 다난짜야와 어머니 수마나데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 멘다까람은

빔비사라 왕이 다스리는 마가다 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부자였다.

 

위사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처님께서 밧디야 지방에 오셨다.

 

이때 부호 멘다까람은 손녀인 위사카와

그녀의 시녀 오백 명을 데리고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는 부처님께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그때 멘다까람과 그의 손녀, 그리고 시녀들 모두가 수다원 과를 성취하였다.


위사카가 나이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역시 대단한 재산가인

사왓티에 사는 미라가의 아들 뿐나왓다나와 결혼했다.

 

그녀가 결혼하고 난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미라가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비구 한 사람이 문 앞에 와서 탁발을 청했다.

 

그런데 늙은 미라가는  그 비구를 보자 몸을 집 안쪽으로 돌려 버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위사카는 그 비구에게 다가가 이렇게 용서를 청했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의 시아버지는

식은 밥을 잡숫는 분이라 밥을 드릴게 없습니다.”

 

이 말은 시아버지 미라가의 귀에도 들렸기 때문에

그는 매우 노하여 위사카에게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인도의 스투파전(2) - 국립 중앙 박물관>

 

그러자 위사카는 자기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여덟 명의 나이 많고 현명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위사카의 아버지가 상당한 재산과 함께 딸려 보낸 사람들로서,

만약에 위사카가 위기에 처하면 도와주라는 부탁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위사카와 함께 미라가에게 가서 전말을 따졌다.

미라가는 말했다.

 

“그때 나는 황금 사발에 우유 쌀죽을 먹고 있었소.

그런데 며느리는 우리 시아버지가

식은 밥이나 잡숫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았겠소?

나는 이런 불경스런 언행을 하는 며느리를 참을 수가 없소.

그래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려는 거요.”

 

위사카가 말했다.

 

“시아버님, 그건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한 비구 스님이 탁발을 오시어 문밖에서 계셨는데,

아버님께서는 몸을 돌려 버리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시아버님은 금생에 들어 새로운 공덕을 지으려 하시지 않고 

다만 전생에 지으신 공덕만으로 사시는구나.

저는 그 비구 스님에게 공양을 드리지 못하는

변명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저의 이런 언행에 대해서 여덟 어르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처신이 과연 잘못이었나요?”

 

그러자 여덟 명의 현자들은 위사카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판정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위사카가 말했다.

 

“시아버님, 저는 마음 속으로 늘 부처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다르마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비구 테라들을 공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앞으로도 비구 테라들을 공양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친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시아버지는 할 수 없이 며느리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위사카는 곧 부처님과 비구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공양 때가 되자 시아버지에게 직접 공양을 올리라고 부탁했는데,

나형 외도 니간타의 제자인 그는 응하지 않았다.

 

공양이 끝났을 때 위사카는 두 번째로 사람을 보내어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라고 시아버지에게 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라가도 응할 마음이 동했지만,

같이 있던 니간타 수행자가 그를 제지하는 바람에 설법회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미라가는 열렬한 니간타의 신봉자로서 니간타 수행자들은

언제나 이 집에 출입하도록 허용되고 있었지만 비구들은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날도 그의 곁에는 니간타스 한 사람이 있어서

그는 공개적으로는 부처님의 설법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궁굼한 나머지 그와 니간타스는 병풍 뒤에 숨어서 설법을 듣기로 했다.

병풍 뒤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결과 미라가는 수다원 과를 성취하였다.

 

그렇게 되자 그는 부처님과 며느리 위사카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그는 며느리를 어머니처럼 존경하여

위사카를 "미라가마따(Miragmata:미라가의 어머니, 鹿子母:녹자모)"라고 불렀다.

 

<인도의 스투파전(3) - 국립 중앙 박물관>

 

위사카는 열 명의 아들과 열명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 딸들은 어머니와 꼭 같은 수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

 

또한 위사카는 값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보석을 잔뜩 박은 코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결혼 기념 선물로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기원정사를 방문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

 

그때 그녀는 코트를 하인에게 들고 있게 했는데,

하인이 그것을 잊는 바람에 코트를 거기에 놓은 채 그냥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원정사에서는 법회가 끝나면 혹시 신자들이

물건 따위를 놓고 가지 않았나 조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물건이 있으면 아난 존자가 이를 보관, 관리했다.

집에 도착한 위사카는 코트를 기원정사에 놓고 온 것을 알았다.

 

그녀는 사람을 수도원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일렀다.

 

“너는 기원정사에 가서 내 코트를 찾아보아라.

그러나 만약 아난다 존자께서 이미 그것을 찾아 보관하고 계시거든

구태여 되찾아 올 것 없다.

그때는 그것을 아난 존자께 시주하도록 해라.”

 

그래서 시중 드는 사람이 가보니

과연 아난다 존자가 그 물건을 보관하고 있었다.

 

시중 드는 사람은 위사카 부인의 뜻을 전했다.

그렇지만 아난다 존자는 그녀의 시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사카는 할 수 없이 그 코트를 팔아서 시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값비싼 코트를 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스스로 구백 구십만 냥의 돈을 내고 그 코트를 되샀다.

이렇게 마련된 돈으로 위사카는 사왓티 성의 동쪽에 거대한 수도원을 지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녹자모 강당이었다.

 

위사카는 녹자모 강당을 완공한 뒤

부처님과 비구 승단에 수도원을 기증하는 의식을 봉했다.

그런 다음 가족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내가 소원하던 바를 모두 다 이루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이렇게 말한 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게송을 읊으며 녹자모 강당 주위를 돌고 또 돌았다.

 

그러자 어떤 비구들은 위사카가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보고를 올렸다.

 

그들은 그녀가 사람이 변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녹자모 강당 주위를 돌고 있다면서,

어쩌면 위사카는 정신이 돈 것이나 아닐까 걱정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오늘은 위사카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원을 다 성취한 날이니라.

그녀는 지금 그 성취감 때문에 매우 만족하여 훌륭한 게송을 읊으며

수도원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며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니라.

위사카는 과거 여러 생을 통하여 언제나 널리 베푸는 시주자였고,

과거의 부처님 때부터 다르마를 열성적으로 포교하는 사람이었느니라.

그녀는 언제나 착한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으며 

전생으로부터 많은 선업을 쌓아 왔던 것이니라.

그것은 마치 화훼 전문가가 농장에서 꽃을 꺾어서 

많은 꽃다발을 만드는 것과도 같이 아름다운 일이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정원사가 꽃밭에서

꽃을 주워 꽃 둘레를 만들듯이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착한 행위를 많이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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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스투파전(4) - 국립 중앙 박물관>

 

1. 기원정사와 녹자모 강당

 

오늘날 "슈라바스티"라고 불리는 사왓티(사위성)는

부처님 당시 갠지스강 유역의 강대국인 코살라국의 수도였습니다.

 

사왓티에는 기원정사와 녹자모 강당의

두 개의 유서 깊은 도량이 있었습니다.

 

좌 기원정사, 우 녹자모 강당이 쌍두마차로서

부처님의 전법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번 스토리는 녹자모 강당의 창건 스토리입니다.

 

부처님의 중생 포교의 1번지로서 사왓티가 중요했던 배경에는 

사왓티에는 부처님의 포교를 후원해줄

유력한 후원자들의 뒷받침이라는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파세나딧 왕은 권력의 힘으로 부처님을 외호해주었습니다.

급고독 장자나 위사까 부인은 재력의 힘으로 부처님을 외호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심각 편대를 이루어 부처님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수행자를 기르고

전법을 펼치는데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급고독 장자나 위사까 부인과 같은 재가자들의

교단 외호에 대한 공덕과 역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급고독 장자나 위사까 부인의 보시가 없었다면

어떻게 부처님의 법이 펼쳐질 수 있었을까요?

 

급고독 장자나 위사까 부인의 보시행을 통해

불교 전법을 위한 뒷받침과 토대 형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인도의 스투파전(5) - 국립 중앙 박물관>

2. 보시 마인드

 

아울러 우리는 이 분들의 환희로운

보시 마인드를 잘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분들의 아낌없는 보시 마인드야말로

'보시 바라밀'에 대한 견해를 바르게 확립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사까 부인의 시아버지는 자이나 교도였습니다.

 

남녀 불평등의 당시 인도 사회에서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이례적입니다.

 

그녀의 친정의 뒷배경이 탄탄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부처님에 대한 그녀의 귀의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말 부처님과 불교 수행자에게 공양하고 싶어요."

 

그녀의 진실하고 확고한 귀의심이 시아버지를 이긴 것입니다.

  

"공양 못하게 하면 저 그냥 가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며느리를 시아버지가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향한 그녀의 확고한 귀의심은

시아버지의 마음을 불법으로 향할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병풍 속에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얼마나 환희스러웠으면

부처님의 가르침를 듣는 즉시 바로 수다원 과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자신을 불법의 길로 인도해 준 며느리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며느리를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고 칭하며 감사해 했을까요?

 

'녹자모 강당'이라는 이름에는 위사까 부인과

이와 같은 시아버지와의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녹자모 강당을 기부하고 나서 얼마나 환희스럽고 기뻤으면

자신의 모든 원이 다 이루어졌다며 감격해하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여자처럼 보일 정도였을까요?

 

부처님과 수행자들을 위한 수행터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자각과,

후세까지 이어질 수행터를 정성을 다해서

잘 지으려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교단에 보시하는 과정과 성취에 대해

정말 행복해 하는 그녀의 마음 세계를 잘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 부처님을 좋아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처님께 좋은 수행터를 바치고 싶었어요."

 

이 마음이 공양하는 자의 진실된 귀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귀의심은 이고득락의 행복과 환희로 그녀를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