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54) 인색한 재정관 아난다 이야기>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인색한 부자 아난다와 관련하여 게송 62번을 설법하시었다.
사왓티에 '아난다'라 불리는 아주 인색한 재정관이 살았다.
그는 황금 팔십만 냥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으나,
아주 빈곤한 사람처럼 살았다.
그는 매달 보름날이 되면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세 가지 훈계를 하곤 하였다.
첫째, 우리 재산 황금 팔십만 냥을
절대로 많은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둘째, 무엇이든지 일단 소유한 것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말 것.
셋째, 언제나 재산을 조금이라도 늘릴 궁리를 할 것.
이같은 훈계를 한 뒤 그는 늘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얘들아, 만약에 아무리 작은 동전이라도
한 푼 두 푼 나가기 시작하면
결국 많은 재산도 언젠가는 다 낭비되고 마는 법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림의 물감이
어떻게 풍화되어 지워지는지,
그리고 개미들이 어떻게 자기 창고에 곡식을 모으며,
벌들이 어떻게 꿀을 모으는지를 관찰해 보아라.
지혜로운 자라면 응당 개미들처럼 가정 살림을
운영해 나가야 할 것이니라.”
그런 지 얼마 뒤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다섯 군데 창고에 쌓여있는 자기의 돈과 황금들을 보여 주고는 그만 죽어 버렸다.
그의 죽음은 욕심의 더러운 때가 쌓이고 쌓인 가운데
맞이한 것으로서 아주 비참하고 치욕적인 것이었다.
이 무렵 사왓티 성문 근처에 있는
짠달라(천민 또는 거지들) 마을에 빈민 수천 명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부자 아난다는 죽어서 그 천민 중의 한 여인의 모태로 들어갔다.
한편 왕은 재정관이 죽은 것을 알고
그의 아들 물라시리를 재정관에 임명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짠달라들은
대개 구걸이 아니면 노동 품팔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난다를 임신한 여인이
아기를 가지고부터 짠달라들에게는 일거리가 생기지 않았고,
또 구걸을 나가도 음식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
“이것은 필시 우리 사이에 누군가
재수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재수 없는 사람을 찾아내기로 결정하여,
먼저 두 패로 나뉘어 구걸을 나가보았다.
그러자 한 패는 음식을 얻어온 데 반하여,
다른 한 패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빈손으로 돌아온 패를
다시 둘로 나누어 구걸을 나갔고,
이런 식으로 분류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아난다를 밴 여인이 재수 없는 여자로 판명되었다.
짠달라들은 그 여자를 추방했다.
그렇게 추방된 여인은 구걸조차도
잘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아기는 기형아였다.
손과 발이 이상스럽게 비틀어지고,
귀 코 입 눈 등도 제 위치에 붙어 있지 않았다.
아기는 괴물처럼 부기 흉한 모습이어서 누구도 좋아하기 어려웠다.
그렇긴 했지만 아기의 어머니는 그 아기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랬으므로 그녀에게는 두 배의 고통이 따랐다.
자기 혼자도 벌어먹기 힘든 형편에 아기까지 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기를 업고 구걸을 가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이 아기가 자신보다 더 재수 없는 팔자라고 보았다.
그래서 여인은 아기를 놓아두고 걸식을 나갔는데,
그러면 겨우 자기 한 사람 먹을 만큼의 음식을 얻어올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아기가 일어서서 겨우 걸을 정도가 되었을 때
여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기에게
찌그러진 그릇 하나를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 때문에 나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아왔단다.
이제 나도 너를 먹여 살리기에 진력이 나는구나.
이 도시 사람들은 여행객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곤 했다.
그러니 이제는 네가 스스로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아라.”
그래서 어린아이는 그릇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얻어먹으며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전생에 자기 집이었전
재정관의 저택에 가게 되었다.
마침내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아이는 세 번째 대문이 있는 곳까지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네 번째 대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전생의 아들인 물라시리에게 들키고 말았다.
물라시리는 그 아이의 흉악한 모습에 당황하여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주인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뛰어나온 하인들이 흉악한 어린 괴물을 내쫓아 버렸다.
이때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와 함께
이곳으로 탁발을 나와 계시다가 그 소동을 목격하시었다.
아난 존자가 사정을 설명 드리자
부처님께서는 물라시리를 불러오라고 하시었고,
곧 물라시리와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부처님께서 물라시리에게 물으시었다.
“재정관이여, 그대는 이 아이를 모르는가?”
“부처님이시여, 모르겠습니다.”
“재정관이여, 이 아이는 그대의
아버지였단 재정관 아난다의 후신이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을 물라시리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아이에게 말씀하시었다.
“너는 지금부터 다섯 군데에 있는
보물 창고를 네 아들에게 찾아 보여주어라.”
그러자 흉물스런 아이는 부처님의
지시대로 다섯 군데의 보물 창고를 찾아 보였다.
그제서야 물라시리는 흉물이 자기 아버지의 후신이라는 것을 믿었고
부처님과 불법와 승가의 삼보에 귀의했다.
부처님께서는 물라시리를 비롯하여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시어 그들이 참된 이익을 얻게 해 주시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내게 아들이 있고 재산이 있다고
어리석은 자들은 집착하나니
제 몸도 오히려 자기 것이 아니거늘
어찌 자식과 재산이 자기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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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색함
<법구경>에는 탐욕으로 인한 악덕 중
인색함의 악덕에 대한 장면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돈이 아까와
병을 고칠 시기를 놓쳐 아들을 죽게 만든 한 아버지 이야기.
길거리에 파는 간식 하나 못 사먹고 집에 와서
혼자서 몰래 옥상에 숨어서 요리를 해먹는 부자 이야기.
앞에서도 두 차례 인색함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이번 아난다 이야기도 인색한 부자 이야기입니다.
앞의 두 이야기는 부처님과 목련 존자의 가르침으로
현생에서 인색함의 잘못을 깨닫고
보시의 가치와 즐거움을 깨닫게 되는 해피앤딩 스토리였습니다.
그러나, 재정관 아난다 이야기는 인색함으로 인해
한 부자가 내세에 받게 되는 박복한 과보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왜 인색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정말 소름끼칠만큼 생생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재테크의 함정
우리들이 살고 있는 21세기.
재테크 열풍이 광풍처럼 우리나라를 휘감고 있습니다.
어떻게 돈을 굴리고 모아서 부자가 될 것인지가
최고의 가치처럼 우리를 현혹합니다.
이 재테크의 방법들이 아난다라는 재정관이
자식들에게 훈계하는 재산 증식법과 비슷합니다.
자신이 가진 종자돈 팔십 만냥을 결코 많은 돈이라고 생각하지 말것.
무엇이라도 일단 소유한 재산은 소비하지 말고 악착같이 모으기만 할것.
어디엔가 투자하여 자신의 돈을 굴릴 방법을 찾을 것.
이 재정관이 자식에게 알려준 비결은
현대에서 재테크의 원칙과 아주 흡사합니다.
아파트 한 채 사서 언젠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 하에서
은행 이자 내면서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아가는 개미 인생...
어찌보면 이 사회가 우리에게 재테크를 강요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재테크 광풍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탐욕을 부추기고 인색함이 마치 큰 미덕인양
우리 삶을 더더욱 옥죄고 각박하게 만들고 있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나머지
돈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관심합니다.
자기 발전을 위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남을 위해 베푸는 나눔의 가치에
등돌리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법구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많은 현대인들에게 섬찟한 경고의 메세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인색함'이라는
변종 바이러스로 변해 자신을 갉아 먹기 시작할 때 어떻게 될까요?
단순히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후에 얼마나 흉물스럽고 박복한 과보가
자신을 기다리는지를 리얼하게 보여주며 우리 모두를 허걱하게 만듭니다.
욕심의 더러운 때가 쌓이고 쌓여 맞이한 비참하고 치욕적인 죽음.
이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3. 보시의 중요함
재산에 대한 집착이든
자식에 대한 집착이든
명예에 대한 집착이든
욕심의 더러운 때가 쌓이고 쌓여서
맞이한 죽음은 냄새나고 더러운 시궁창의 길인 것입니다.
왜 불교뿐 아니라 많은 종교에서 나눔과 보시를 중시하는가요?
나눔과 보시는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기 마음의 욕심의 더러운 때를 벗기는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울러 죽어서도 자신의 복덕을 쌓는 덕행의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욕심의 더러운 때가 쌓이고 쌓여
비참하고 치욕적인 죽음의 길이 아니라
베품의 아름다운 꽃이 쌓이고 쌓여
풍요롭고 향기로운 복덕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 몸도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자식과 재산이 자기 것이랴?' 고 하셨다.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몸과 자식과 재산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여기에 갈망하고 집착하여 욕심의 더러운 때가 쌓이고 쌓여 냄새나고 비참한 윤회의 길을 갈 것인가?
윤회를 믿는다면 정말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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