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기행(4) 화순 고인돌 >
1. 고인돌 문화
화순 고인돌.
화순은 무등산을 사이로 북쪽에는 광주,
서쪽에는 나주와 접하고 있습니다.
무등산은 서석대, 입석대 등
신비로운 거석으로 유명한 산입니다.
그렇게 돌이 많아서인지
화순에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지대가 있습니다.
화순 고인돌은 화순 도곡면 효산리 에서
춘양면 대신리 쪽으로 향하는
약 5km 보검재 고개길 사이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약 500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길게 군락을 지어 형성되어 있습니다.
등산 겸 걸어서 다니는 사람도 있고,
고갯길을 따라 자동차로 드라이브 쓰루를 해도 됩니다.
고인돌은 2800년~2500년 사이의
청동기 시대때 조성된 고인돌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고인돌은
남한은 고창, 화순, 강화를 중심으로 약 2만 4천 기,
북한은 평양, 은율 등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약 1만 4천 기 해서
약 4만기가 있다고 합니다.
스톤헨지 같은 거석 유적이 많은 아일랜드도
1천 5백기 정도 고인돌이 있고,
전세계적으로도 약 8만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전세계의 절반에 육박하는
고인돌을 보유한 고인돌 보유국입니다.
고대부터 고인돌을 수없이 조성할만큼
선진적인 정신 문화와 뿌리를 가졌던 땅이니 자긍심을 가질 만합니다.
2. 영원에 대한 근본 욕망
그런데, 한반도에 전세계 고인들의
50%가 넘게 있다는데 신기하고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것도 강화, 고창, 화순 등의 서해안과 전라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석(巨石) 문화는 세계적으로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문화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명한 것으로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이집트의 피라미드이겠지만,
이렇게 세계 곳곳에 거대한 돌로 무덤을 만들거나,
제사 의례를 지낸 거석 문화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돌은 영원을 상징합니다.
일부러 부수고 깨면 그 영원성은 훼손되지만,
내버려두면 천년 만년 억년을 갑니다.
오죽하면 불교에서 아주 커다란 바위를 천녀가 날개옷으로
한 번 두 번 쓰다듬어서 그 돌이 없어졌을 때를 1겁이라고 한다 했을까요?
그러니 수 천년전의 인간들도 죽음에 대한 고뇌를 했고,
그 고뇌끝에 영원성을 부여한 돌에
자신 또는 자신의 가족들의 영혼을 의탁했던 것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고인돌에
죽은 이의 영혼이 들어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고,
이런 믿음은 자연스럽게 돌에 형상을 새겨
석장승이나 석불로 변천되어 갔을 것입니다.
거석 문화에서 고인돌과 함께 선돌(입석)도 유명합니다.
선돌, 입석, 입암 등의 여러 이름이 있고,
선돌 마을, 입석리, 입암리 등등의 지명이
붙은 곳에는 하나씩 커다란 서 있는 돌이 있습니다.
불교가 전래되어 선돌이 석불이나 미륵불로
산이나 마을과 절에 세워지게 되었지만,
그 근원을 따라가면 조상 숭배와 정령 신앙을 거쳐 '영원'과 만납니다.
결국 영원 또는 불멸을 향한 인간의 근본 욕망일 것입니다.
3. 고인돌 발굴지 전시관
화순 고인돌의 종점인 춘양면 대신리에는
고인돌 발굴지 전시관이 있습니다.
고인돌을 어떻게 조성했는지에 대한 그림과 함께
고인돌 굄돌 하부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100여년 전만 해도
고인돌의 모양과 규모에 대해 놀랐는데,
왜 고인돌을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인돌 아래에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고인돌이 신석기 시대인들의 무덤이자 제단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고인돌은 한문으로는 '지석(支石)'이라고 합니다.
'지(支)'는 지탱한다. 버틴다, 고인다 는 뜻입니다.
밑에는 시신을 안치하고 큰 돌로 덮고 '고인(支) 돌'입니다.
그동안 고인돌 바깥 형태만 주로 보았는데,
아래 내부를 선명하게 보니
고인돌을 어떻게 왜 조성했는지 감이 옵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4. 핑매 바위
화순 고인돌에서 가장 큰 고인돌은 핑매 바위입니다.
전라도 사투리로 '돌팔매'를 '핑매'라고 한다고 합니다.
저 바위 위에 돌을 던져 돌이 머물면
좋은 배필을 만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거대하고 신령스런 바위다 보니
화순에 살던 '여흥 민씨' 문중에서 자신들의 장지라고 조각을 해 놓았습니다.
5. 채석장
핑매바위 윗쪽 2백여 미터쯤에는 채석장이 있습니다.
보검재에는 몇 곳의 채석장이 있다는데
그 중 한 채석장입니다.
핑매 고인돌을 오르면 채석장이 있다.
채석장에서 직접 보니 바위를 둘로 쪼갠 흔적 등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큰 돌산이 있었기 때문에
수백기의 고인돌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톤헨지 채석장은 스톤헨지에서 240마일(약 386km)이나 떨어져 있다지만,
화순 고인돌의 채석장은 아주 가까운 근처에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 선조들이 영국의 선조들보다 머리가 좋았다고 해야할까요?
여기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 산비탈이니 아래로 굴려서
이케저케 무덤을 만들고 고인돌을 세웠던 것입니다.
전체 마을사람들이 동원 되었을테니
공동체 모두가 석수이자 석공이었을 것입니다.
6. 장례 문화
이랬던 거석 문화가 청동기 중기를 지나면서 슬슬 사라지고,
나주나 창녕 고분군, 경주의 거대한 고분들처럼 변한 것이니,
이걸 기술의 발전이라고 해야할까 경제력과
권력의 거대화가 빚어낸 신문화라고 해야할까요?
현대에 들어 장례 문화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급격히 변화되고 있습니다.
문화는 짧은 겹치는 시기를 지나면
완전 빠르게 새로운 문화로 장착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이집트도 어느날 갑자기
더 이상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종교라는게 참 엄청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라미드도 종교의 힘으로 돌을 쌓아 올린거고,
종교가 바뀌니까 피라미드를 만들 이유가 없어져서 안 만들게 된거니까요.
우리 나라도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바뀐 것은
조상 숭배가 사라지게 된 것과,
불교의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발휘된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많아지는 것도
숭배할 조상이 천국이나 극락으로 갔거나 윤회했을 꺼라고 믿는 믿음과,
죽으면 끝이라는 믿음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새로운 종교나 믿음이 생겨나면
그에 따라 장례문화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죽은 시신을 손상되지 않도록
애지중지 보호했던 장례 문화는
'영생과 부활'에 대한 종교적 믿음 때문이었고,
만약 새로운 부활의 방식이 어느 종교가 전파하면
그에 따른 방식의 장례 문화가 형성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라는 것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문화의 영향을 받는 걸 넘어
어느 문화에 종속되거나 지배당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를 창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화순에서 엄청난 규모의 고인돌을 보고 즐거웠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은 와 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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