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기행(9) 남원 실상사>
1. 편안한 평지 도량 실상사
남원 실상사.
실상사 극락교를 건넜습니다.
이제 푸르게 물든 지리산과 함께
달궁 계곡에서 흘러나온 내천이 흐르는
실상사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풍광입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실상사는
평평한 평지에 지어진 절입니다.
산자락에 위치한 대부분의 절들이
경사가 급하든 완만하든
산지가람인 것에 비해 실상사는 완벽한 평지가람입니다.
손님으로 들러본 실상사의 느낌은
언제나 편안하고 평화로운 절입니다.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왔다 가든,
불자들이 조용조용 참배와 기도를 하고 가든 냅둡니다.
절이라기 보다는 시골 외할머니 집같은 느낌입니다.
절이 논 한가운데 있어서
평지 가람이더라도 분위기가 색 다릅니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어느 장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쌍탑과 석등이 없었다면 장원이라 해도 믿을겁니다.
그러나, 선종인 9산 선문 중의 하나이고
탑도 신라 후대에 건립된 천이백 살 쯤 된 나이 많은 탑입니다.
크고 화려한 전각이 없을 뿐이지 노고단 너머에 있는
화엄사 못지 않은 짱짱한 역사와 위세를 가졌던 절입니다.
2. 실상산문을 개창한 홍척 국사
9산선문 실상사파의 개조는 홍척 국사입니다.
원래 지금의 실상사는 '지실사' 라는 이름의 작은 절이 있었고,
홍척 국사가 머물던 장소는 조금 떨어진 백장암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제자들이 많아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어,
제자인 수철 화상때 지실사로 이전했답니다.
'실상사' 라는 이름은 고려초 홍척 국사의
'실상선정국사(實相禪庭國師)’의
존칭 두글자를 따서 새로 지은 것입니다.
실상사는 넓은 하천 건너편의 논밭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불사도 끝났고 발굴공사도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황룡사 9층목탑처럼 큰 목탑이 있었다는 목탑터가 말해주듯
그 옛날 실상사 사이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빅 사이즈였습니다.
또 하천 변의 담장과 맞닿은 곳(지장전 뒷편쯤)에는
연못정원과 비슷한 연못 정원이 발굴되었습니다.
즉, 고려시대까지는 거대 사찰이었다는 겁니다.
홍척국사의 제자가 천 명이었다 하고,
불국사처럼 회랑으로 연결된 건물터 중에서 가장 컸던
승방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면적이 더 큰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정유재란때인가 전소되었던 실상사는
숙종 때 30여동으로 재건되었는데,
1882년에 절땅을 가로챌 지역 유생들의 못된 방화로 다시 전소되었습니다.
그리고, 2 년뒤 조촐하게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어 내려오다
근자에 몇 동의 건물불사로 그나마 격식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홍척 국사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 국사와 함께
중국의 서당 지장에게서 함께 선을 배웠습니다.
도의국사가 5년 먼저 신라로 귀국했지만,
변변한 후원자를 만나지 못하고
설악산 진전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반면 홍척 국사는 왕과 태자의 후원을 받아
신라 9산선문 중 최초로 실상사 문을 열었습니다.
홍척 국사의 깨달음과 지혜는 선에서 왔겠지만,
시절인연이 좋아 튼튼한 후원자를 만난 것인지
후원자를 설득하고 교화할수 있는
홍척 국사만의 기술이 있었던 것인지 9산선문을 개창했습니다.
3. 실상사를 번창하게 한 수철 선사
호부에 견자 없다고 하지만,
2대에 걸쳐 뛰어나기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스승 아래
항상 뛰어난 제자가 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런데 홍척국사는 후원자를 얻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제
자를 기르는 기술도 뛰어났나 봅니다.
제자인 수철 화상의 부도탑과 탑비도 실상사에 있습니다.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실상사 선문을
크게 부흥시킨 장본인이 수철 화상입니다.
자신이 세운 공을 스승에게 넘기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으니,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홍척국사의 위용도
실제로는 수철화상의 업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수행자의 길을 나서 각고의 노력으로 결실을 얻었고,
그 결실을 이땅에 뿌리 내리고 꽃피우는데 성공한 선각자들이셨으니
훌륭하고 훌륭하신 사제지간이십니다 라고 찬탄할 뿐입니다.
4.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대승불교의 신앙
약사전의 철불약사여래 입니다.
우리 나라도 곳곳에 약사여래불을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못지않게 약사여래불 신앙도 곳곳에 전파되었던 것이지요.
살아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힘써 배워 닦고,
심신의 이러저러한 병고는 약사여래께 의지해 가피를 구하고,
죽어서는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로 왕생하길 소원했던 것이
우리 나라 이땅의 불자들의 기본 마인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인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이 어느 부처님을 원불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잘 배워 닦는걸 게을러서는 안되고,
유한하고 무상한 몸과 마음을 갖고 살기에 겪어야 하는 생노병사와 우비고뇌의
괴로움을 지금 당장 줄여주고 없애주시겠다는 약사여래불의 원력과 가피를 받고
구할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윤회중생의 입장에서
크고 깊으신 원력으로 극락세계를 마련해주신 아미타불께 귀의해,
이 생을 마친 뒤에는 성불의 그날까지 극락에서 모든
불보살님께 공양하며 수행하겠다는 소망을 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불보살님이 하도 많고 다양해서
어느 분께 예배하고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불자가 아니거나 초보 불자 시절에나 하는 소리입니다.
절에 가서 부처님이 보이면 절도 잘하고,
각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에 맞는 소원도 잘 빌어야 하겠습니다.
5. 법화경의 영원한 수명의 부처님에 대한 가르침
법화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지니셨다고 합니다.
왜 이 가르침이 중요할까요?
교과서적인 정답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는 억겁의 윤회속에서 구르고 있는 중생들이
그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한 불법도 상주하기 때문에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영원히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설사 현생에서 부처님을 모르고 불법을 몰랐어도
다음 생 그 다음 생을 통해
언제라도 부처님을 알게 되고 불법을 알게 될 수 있으니,
그것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불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이웃과,
다음 생의 나와 다음 생의 내 가족과 다음 생의 내 이웃...
부처님께서 영원히 상주해 주심으로써
우리는 몇 번의 기회를 놓치더라도
구원의 기회 자체까지 놓치는 일은 없다는
이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깊은 안심과 환희심을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평양이나 대서양의 바다 한 가운데
어느 섬에 우리가 있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섬은 무서운 독사나 맹수들이
아무때나 출몰해서 사람을 해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섬에서 집으로 가는 배 편이 딱 하나만 남았다고 합시자.
그리고 내가 딴짓하고 있느라 배에 타지 못했다고 합시다.
이러면 기분이 어떨까요?
미치고 팔짝 뛰겠지요.
섬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울고불고 난리난리 해보다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아무튼 무지하니 암울한 나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그 배가 마지막 배가 아니었소.
하루에 세 번씩 연중무휴로 배 편이 마련되어 있으니 안심하시오."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이면 얼마나 기쁘고 환희롭겠습니까?
오랫만에 보게 된 실상사와
사방의 지리산 자락을 보니 반가웠습니다.
차를 타고 오래 달려 실상사에 도착하니 피로가 쏵 날아갑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할 수 없이 좋은 것도 치뤄야 할 대가와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 명당에 자리잡은 평지 도량인
실상사는 이번에도 조용하고 평안했습니다.
평화로운 상호의 철불 약사 여래 부처님!
언제나 평화로운 실상사와 지리산을 잘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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