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43) - 경전 번역의 선구자, 구마라집 법사(3) -
조국의 멸망과 파계>
1. 조국 쿠차의 멸망
전진의 황제 부견은 실크로드를 정벌하는
장군 여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제왕은 하늘의 명에 응하여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하여 정벌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도의를 품는 사람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짐은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을 익숙히 잘 알아 후학들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건대 어질고 밝은 이들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만약 쿠차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마를 급하게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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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는 북방 민족이 중국을 차지한
5호 16국 시대에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유가나 도가 등과 같은 기존 사상들이
뿌리깊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존 한족 문화권에서
불교가 뿌리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호 16국은 북방의 이민족들이
중국 본토로 들어와 정권을 수립했던 혼란기였습니다.
이들은 기존 중국의 유교나 도교 사상 대신
불교를 옹호하며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전진의 부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진의 부견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는 등 우리 역사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그는 당시 남쪽으로 쫒겨가 있던 한족 정권을 멸망시켜
중국 천하를 통일할 계획을 세울만큼 정치적 야심도 큰 인물이었습니다.
전진의 부견은 9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의 동진과 "비수의 전쟁"을 벌였지만,
비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비수의 전쟁은 중국 역사상 3대 전쟁으로 일컬어집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야망이 컸던 부견은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세력 판도를 넓히려는 야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서역 제일의 고승인 구마라집을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여
불교를 통한 지배 이념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미녀 헬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듯이,
한 사람의 유명 인물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한
몇 안 되는 인물이 구마라집이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것입니다.
2. 파계와 모욕
한편,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구마라집 법사는 쿠차 국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고 합니다.
"쿠자국의 국운은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쿠차 국왕은 구마라집 법사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진의 여광에게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습니다.
여광은 쿠자국을 격파하여 쿠차 국왕을 죽이고,
부견의 지시대로 키질 석굴에 있던 구마라집 법사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여광은 서역 제일의 고승이라는 구마라집 법사가
나이가 지긋한 승려인줄 알았는데, 38세의 젊은 승려였습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던 여광은
구마라집 법사의 나이 어린 것만 보고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더해서 여광은 구마라집 법사를 강제로 파계시킴으로써
구마라집을 존경하는 실크로드 전체에 자신의 위력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여광은 구마라집 법사를 강제로 파계시켜 쿠자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여광은 환속했던 구마라집 법사의 아버지 구마라염을 거론하며
구마라집 법사를 괴롭혔습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버티며 수락하지 않자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구마라집 법사가 파계하지 않으면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며
승려로서 파계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광은 이후에도 구마라집 법사를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며 장난질을 하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여광은 쿠차가 실크로드 교역으로 쌓아두었던
엄청난 양의 진귀한 재물을 무려 20,000여 마리의 낙타에 실고,
생포한 쿠차 사람 3만여명의 포로들을 노비로 쓰기 위해
이들을 데리고 당시 전진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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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법사의 파계는 강압에 의한 파계였습니다.
출가한 학승으로 공부와 수행에 열중하던
구마라집에게는 큰 시련이었고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사기>를 지은 중국의 역사학자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는 큰 모욕 속에서도
중국의 역사를 지으라는 아버지의 유언과
사기를 쓰겠다는 자신의 숙업을 지키기 위해
큰 모욕 속에서도 다시 일으섰습니다.
구마라집 법사 또한 계율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보다
대승을 선양하라는 어머니의 유훈과
법사로서의 자신의 서원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성년이 되어 어머니와 헤어지며,
동방에 대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구마라집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대승으로 전환한 뒤에 구마라집 법사에게는
이러한 강한 서원과 사명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구마리집은 출가 승려로서 계율을 지키는 것 대신
굴욕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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