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44) - 경전 번역의 선구자, 구마라집 법사(4) - 16년간의 유폐 생활

by 아미타온 2024. 8. 2.

 

<불교 인물사(44) - 경전 번역의 선구자, 구마라집 법사(4) - 

16년간의 유폐 생활>

 

<구마라집 법사가 경전을 번역한 중국 장안 초당사>

 

1. 여광 휘하에서 16년의 감금 생활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광이 귀환하는 도중 전진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요장'이 전진의 왕인 부견을 살해하고 황제가 된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요씨가 부씨 일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이후를 '후진(後秦)'이라고 합니다.


구마라집 법사를 붙잡은 여광은 자신이 모시전 황제인 부견이 살해당하자

전진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쿠차와 장안의 중간에 있는 양주(凉州)에 머물러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나라 이름을 '후량(後凉)'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파계한 구마라집 법사는

후량의 황제가 된 여광의 휘하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한번은 여광이 전쟁을 벌였는데,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습니다.


그러자 구마라집 법사는 이 곳에 있으면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으므로 언덕 위로 이동시킬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여광은 구마라집 법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 되자, 

여광은 그제서야 구마라집 법사를 남다르게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구마라집은 여광의 휘하에서

연금 상태에서 참모 노릇을 하면서 많은 중국 사람들과 사귀었습니다.


때로는 승려들이 와서 그에게 불법을 토론하기고 하고,

여러 명사들이 찾아와 그의 뛰어난 학식에 감탄하였습니다.
 
여광은 몇 년후 병으로 죽었고,

그 뒤로 왕위 권력 다툼으로 후량은 어수선하였습니다.


여광의 뒤를 이은 자식들도 구마라집 법사를 풀어주지 않고

계속 감금하였습니다.


후량의 양주에서 구마라집 법사는 무려 16년간을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권력 다툼과 전란 속에서 위기의 시간을 보내었지만,

이 때 중국인들과 사귀며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


구마라집 법사에게 적의 포로가 되어 유폐된채 지냈던

16년간의 세월은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왕위 쟁탈의 권력 투쟁, 여

러 차례의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생들의 욕망과 그 과보를 여러 차례 목격하며 

인생 속에서 선악의 인과법을 체득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긴 감금 시간 동안

그는 허송세월하지 않고

대승을 선양하는 법사가 되려는 서원대로
중국어를 완벽히 배우며 여러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했을 것입니다.

 

<구마라집 법사 기념관(중국 장안 초당사)>

 

2. 후진의 요량과의 만남

 

한편, 후진의 요장 역시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그를 모셔올수 있도록 후량에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씨의 왕조인 후량은 구마라집 법사가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후진의 요씨들을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며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후진의 요장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이 왕위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후량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401년 3월, 요흥은 서쪽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후량을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요흥의 군대가 당시 후량의 왕이었던 여륭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자,

9월에 여륭이 요흥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구마라집 법사의 연금은 풀려 그 해(401년) 12월 20일,

50살이 넘은 나이에 마침내 후진의 수도 장안에 도착하였습니다.


요흥은 국사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 법사를 특별한 총애하였습니다.


요흥이 구마라집과 이야기하면 하루 해가 지나가는줄 모를 정도로 

구마라집은 법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고 박식하였습니다.
 
요흥은 어려서부터 불법에 귀의하였고,

경론을 결집하리라고 뜻을 세웠습니다.

불법이 중국에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습니다.


그 뒤 약 400여년이 지나 여러 승려들이

불교 경전을 많이 번역하였으나,
어학 실력 부족과 의미 전달이 잘못되어 잘못된 오역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이해의 어려움과 해석의 논란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불교 용어를 도가의 경전에서 빌려오거나,

불교 사상을 도가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할 상황에서 구마라집 법사가  등장한 것입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인도 유학 시절에 닦은

산스크리트어 실력과 경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
그리고, 16년이 넘는 감금 시절에 닦은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경전 번역 작업의 적임자였습니다.


요흥은 젊고 똑똑한 승려 8백여 명을 선발하여

구마라집 법사에게 공부를 배우게 하고
구마라집 법사를 중심으로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

 

불교 공부의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번역의 난해함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경전이나 논서가

우리나라 말이나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고
제대로 된 번역이 잘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교 공부하는데 드는 노력이나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당시 상황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불경 자체의 어려움보다

난해한 오역 때문에 어려운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불교의 역사나 사상적 체계에 대한 배경 지식없는 상태에서 
대승, 소승 모든 경전들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학습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없이 다양한 경전과 논서를 둘러싸고
부처님의 근본 뜻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과 많았고,

공부의 어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드디어 이 상황을 종식시킬 뛰어난 법사이자 번역가인

구마라집 법사가 등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