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46) - 경전 번역의 선구자, 구마라집 법사(6) -
8년간의 역경 작업>
1. 진흙 속의 연꽃
한편, 구마라집 법사는 평소 대승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대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는 경전 번역 작업 외에도
제자들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자주 설법하였습니다.
그는 강의하기 전에 언제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이
모든 사람들은 냄새 나는 진흙을 보면서도 오직 연꽃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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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법사가 번역한 <유마경>에는
'번뇌즉도량"이라는 말이 자주 인용됩니다.
굴곡진 삶 속에서도 보살적 삶을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을 대변하듯
'진흙 속에 핀 연꽃'에 대한 비유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온후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였고,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은 위대한 번역가임과 동시에 포교사였습니다.
고난의 삶 속에서 그가 인내하며 경전 번역 작업을 시도한 것도
대승의 가르침을 선양하려고 하는
그의 위대한 대승의 포교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2) 미녀 10명과 함께 산 구마라집 법사
한편, 구마라집 법사의 뛰어난 학식과 인품에 매료된 요흥은
만일 구마라집이 세상을 떠나면 그의 뛰어난 자질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후사를 얻기 위하여 억지로 구마나집 법사의 곁에 10명의 미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마라집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요흥은 별도로 관사를 지어 구마라집 법사를 머물게 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습니다.
경전을 번역하거나 강의를 할 경우에 구마라집 법사는 이 관사를 이용했습니다.
구마라집이 법사의 몸으로
절에 기거하지 않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자
외국에서 온 승려들은 이것을 혐오하여 그를 피했고,
후대의 출가 승려들은 이러한 구마라집 법사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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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법사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에 비해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가 한족 출신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승려였다는 것과
둘째는 그의 승려로서의 파계 행적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쿠차국에서 여광에 의해 파계한 후로는
출가 승려로서의 삶보다는 재가 보살적 삶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권력의 보호와 세속적 삶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서원적 삶에서 권력의 보호나
세속적 삶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란의 시대에 대승을 선양하는 서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서원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경전 번역과 대승 포교를 한 그에게는
오히려 권력의 후원과 함께 세속적 삶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출가 승려에게 재단하는 금욕적 잣대로
무조건적 비난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3. 마지막 유언
생의 마지막 8년간을 불꽃같은 삶을 살던 구마라집은
409년 8월 20일, 병에 걸려 대중들과 사별하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고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 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그가 머물던 관사인 소요원에서
불교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습니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그의 유언대로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고 <양고승전>은 적고 있습니다.
후일에 어떤 외국의 승려가 와서
다음과 같이 구마라집의 빠른 열반을 애석해하며 말했습니다.
"구마라집이 암송한 것 중에
열에 하나도 번역해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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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법사의 마지막 모습은 신화적 측면이 강합니다.
화장한 후에도 혀가 타지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의 번역이 그만큼 훌륭했고 완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문을 사용했던 동아시아권 사람들에게
그가 번역한 경전들이 불교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요즘 들어 한문을 거치지 않고
인도 원전을 우라나라 말로 번역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로 아함부 계통의 초기 경전들에 대해
이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역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 경전 번역 작업은 참으로 중요한 보살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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