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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48) - 구도 열정과 모험의 역경가, 삼장법사 현장(1) - 출가

by 아미타온 2024. 8. 20.

<불교 인물사(48) - 구도 열정과 모험의 역경가, 삼장법사 현장(1) - 출가>

 

<중국 장안(서안) 대안탑과 현장 스님 동상>

 

불교 역경사에 있어 구마라집과 함께

쌍벽으로 불리는 분이 삼장법사 현장(AD 600~664)입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삼장 법사 현장의 삶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인도어에 능통한 중앙아시아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삼장 법사 현장은 순수 중국인이었습니다.

 

현장 스님은 고난 끝에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로 직접 건너가 나란다 대학 등에서 불교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성지를 비롯한 인도 곳곳을 여행하고 경전을 가져와

국가(당나라)의 후원하에 역경 작업을 하였습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주로 번역한 경전이나 철학서는

주로 초기 대승 경전이나 중관학파 논서였습니다.

 

현장 스님은 구마라집 법사의 번역 경전들 외에도

소승의 여러 논서나 유식(唯識)학의 교학을 비롯한

중기 대승불교 경전까지 번역하였습니다.

 

번역한 경전의 양은 오히려 구마라집 법사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현장 스님은 원전에 충실한 꼼꼼한 직역과 함께

대소승의 여러 논서를 번역해냄으로 중국 역경사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현장 스님이 번역한 여러 논서들은

동아시권에서 불교학의 철학적인 논쟁과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원효 대사와 의상 스님도 중국의 현장 스님이 주도한

새로운 유식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 유학을 계획했던 것이었죠. 

 

또한, 현장 스님은 실크로드와 불교성지를 포함한 인도의 곳곳을 여행하고

<대당서역기>라는 유명한 여행기를 남겼습니다.

 

이 여행기는 7세기 실크로드와 인도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불교사의 변천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뽑힙니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구법 여행은

현장 스님의 불법을 구하는 구도열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현장 스님의 구법 여행은 손오공, 저팔계가 나오는

<서유기>라는 불교 문학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구법 열정과 모험심, 꼼꼼한 경전 번역으로 

구마라집 법사와 함께 중국 역경사의 두 거성인

현장 스님의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물품을 지고 황량한 실크로드를 건너 인도로의 구법 여행을 하는 현장의 모습 >

 

1. 현장 스님의 어린 시절

 

현장 스님의 조상은 북서 중국의 낙양에 살았습니다.

현장 스님의 속가 성은 진(陳)씨이고, 이름은 위(緯)였습니다.

 

현장 스님의 할아버지는 북조 왕조 중 북제의 국사(國師)였습니다.

아버지는 유학에 정통했던 학자로 그의 집안은 학자 집안입니다.

 

현장 스님의 아버지와 형은 외모가 수려하여 위풍당당하였다고 하는데,

현장 스님 또한 뛰어난 용모와 체구를 지녔다고 합니다.

 

현장 스님의 아버지는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양제 말년에

중부 중국에 있는 강릉의 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수나라의 왕조를 받드는 것을 싫어했는지

일찍이 관직을 사퇴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현장 스님의 형은 출가하여

낙양의 정토사(淨土寺)에서 지냈습니다.

 

현장 스님의 형의 법명은 '장첩(長捷)'이었는데,

경전을 강의하고 해석하는 데에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현장 스님의 생가는 점점 궁핍해졌기 때문에

형인 장첩은 어린 현장을 집에서 데리고 나와 절에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장이 출가한 동기입니다. 

 

<중국 장안(서안) 대자은사의 현장 스님상>

 

2. 현장 스님의 출가와 공부

 

이것을 볼 때 이들 형제는 처음에는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절에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가한 현장은 경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1살 때 <유마경>과 <법화경> 등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어린 사미들이 농담이나 하고 장난을 즐기고 있는 동안에 

현장 스님은 공부에 열중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출가자는 해탈법을 닦아야 하거늘, 

어찌 나쁜 장난이나 하면서 세월을 헛보낼 수 있겠는가?" 

 

낙양의 혜일사(慧日寺)에서 경전과 논서의 강의가 있으면

어린 현장 스님은 빠짐없이 참석하여 청강하였습니다.

 

현장 스님은 15세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경전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에 대한 평판이 널리 퍼졌습니다.

 

현장 스님이 해탈법을 추구하는 열정과 함께

부단 정진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낙양은 더 이상 배울 만한 학자가 없어서

장안에 있는 장엄사(莊嚴寺)로 갔습니다.

 

그러나, 장안에도 뛰어난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장안은 수나라 양제의 폭정과 반란으로

전란과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 형과 함께 난리를 피해서

중국 서부에 있는 촉(蜀, 四川)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불교가 매우 활발하게 연구되고 강독되고 있었습니다.

구법 열정에 불타는 두 형제가 공부하기에 아주 적합했습니다.

  
당시 촉 지방에서는 아비달마나 비바사론과 같은

소승 불교의 철학 이론이 성행했습니다.

 

현장 스님은 후일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유식 불교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현장 스님의 흥미나 탐구심은

이 때 소승의 논서인 아비달마나 비바사론을

공부하면서부터 싹튼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식불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명상을 통해 해탈을 추구해나갑니다.

 

유식 불교를 정립한 인도의 세친 스님은

원래 "구사론"이라는 소승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을 쓴 설일체유부의 학자였습니다.

 

후일 대승으로 전환한 후 

아비달마 논서에 나오는 수많은 불교 개념들을 기반으로 

대승 불교의 유식 불교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현장 스님은 몇년간 촉에서 살면서

듣거나 읽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고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설해지지 않은 점까지도 명상하고 고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의 승려들도 현장 스님의 박학다식과 뛰어난 암기력,

논리 정연한 논설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 스님은 21세에 촉을 떠나서

형주, 양주 등의 중부 중국을 유행하였는데

이곳에는 위대한 학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강을 건너 중국 북쪽로 가서

성실론의 학자인 도심(道深)에게 10개월,

업(鄴)으로 가서 고승인 혜휴(慧休)로부터

대∙소승의 교학을 다시 8개월 동안 배웠다고 합니다.

 

혜휴 스님은 현장 스님의 뛰어남을 보고

스승의 예를 받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현장에 스님에게 배운 것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리하여 중국 각지의 고승 석학을 방문하고 

당시의 모든 불교학을 배웠습니다.

 

더 이상 중국에서는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까지 되었으나,

자신의 공부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이 많았습니다.

 

현장 스님은 직접 인도로 가서 불교 원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올랐습니다.

 

특히, 당시 처음으로 전래된 유식 불교의 심오한 뜻을

더욱 깊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도 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장 스님은 새롭게 중국을 지배하게 된 당나라 왕실에

여러 번 주청하여 인도로 법을 구하러 가기를 발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역의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지 않아

중국인의 국외 여행이 금지되었던 터라 허락을 얻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관(貞觀,당나라 태종) 3년(629),

현장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에 큰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장안, 낙양 등지에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백성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성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장 스님은 이 틈을 이용해서 피난민 틈에 끼어

정부에 알리지 않고 서역으로 구법 여행 길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