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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49) - 법화경(8) / 영원한 수명의 부처님

by 아미타온 2024. 8. 7.

<불교의 역사(49) - 법화경(8) / 영원한 수명의 부처님>

 

<법화경 변상도>


1. 땅에서 솟아올라온 한량없는 보살들

 

그리고, 법화경 제 15장 <종지용출품>과 16장 <여래수량품>은

이러한 부처님의 정체성(불신관)에 대해 다시 한번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제 15장 <종지용출품>에서는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자

땅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천억 보살들이 땅에서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수천억 보살들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보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 11장 <견보탑품>에서

한량없는 부처님의 분신 부처님들을 보았슴에도

수많은 대중들은 의심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땅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얻으시고

이 세상에서 설법 한 시간이 기껏해야 40년밖에는 안 되는데,

어떻게 이토록 많은 보살들을 교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법화경 변상도>

2. 부처님의 영원한 수명과 교화

 

그래서, 대중들을 대표하여 미륵 보살이 부처님께

어떻게 이토록 짧은 시간에 한량없는 보살들을 가르치고

교화해서 발심하게 하실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대들은 여래의 말이 진리임을 믿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3번이나 권고의 말을 되풀이하고 답을 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 어려운 설법을 하실 때나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설하실 때

여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3번이나 권고의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16장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것을 설법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40년 동안

가르침을 설한 한 깨달은 성자 석가모니가 아니라,

백천만억 나유타(1000억에 해당되어지는 가장 큰 숫자)겁

이전에도 이미 성불하신 부처였다는 것입니다.

 

즉, 태어남도 죽음도 없이 영원히 현존하는

부처님의 실상에 대해 설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드셨습니다.

 

"누군가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먼지로 만든 다음,

동쪽으로 여행을 한다고 하자.

이 사람은 오백 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삼천대천세계를 지난 다음

앞의 먼지 1알을 내려놓는다.

이러한 식으로 모든 먼지를 내려놓을 때까지

여행을 계속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여행을 하겠는가?"

 

그런데, 부처님은 이 먼지들을 다 떨어뜨리는데 걸리는 시간만큼

이미 부처의 경지를 실현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오백진점(五百塵點)"의 비유를 드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사바세계에 살면서 수많은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여 왔노라.

그리고, 똑같이 무한한 수의 다른 국토에서도

법을 설하고 중생들을 도왔느니라."

 

이처럼 부처님(여래)의 수명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해서,

우리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탄생>

 

3. 역사의 부처님과 실상의 부처님

 

그러므로, 부처님을 2,500년 전에 실존했던

역사적인 인물인 석가모니로만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석가모니가 이미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부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탄생도 죽음도 없는 부처님은

언제나 이 세상에 늘 상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중생이 나를 찾아오면,

나는 그들이 어떠한 무지로 인해 어떤 장애물을 만들어냈으며

어떤 형태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가장 유익할지 지혜의 눈으로 관찰한다.

그런 다음 그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방편으로 놀라운 법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개중에는 소승을 더 잘 이해하고 좋아하는 자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자들을 불도로 인도하고 이들의 변화를 돕기 위해,

태어나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 법을 가르치다

열반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지혜로운 방편을 쓴다.

그렇지만 실제로 여래는 이미 부처였으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상을 포함한 많은 세상에서 중생들을 가르쳐왔노라."

 

즉, 부처님이 역사적인 차원 속에서 현현하는 것은,

다시 말해 특정한 가문의 특정한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의 한 생을 살다가 가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켜

그들을 변화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일종의 마술쇼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시공간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역사적인 부처들로 현현하는 것은

가르침을 위한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편을 통해 부처님은 중생을 가르치고

해탈로 인도하는 일을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시한번 모든 여래가 현현하는 과정들인

'불도를 성취하는 8가지 외적인 형상'인

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하천(下天), 탄생을 의미하는 탁태(託胎),

고통을 접하는 강탄(降誕), 수행의 길을 가는 출가(出家),

마왕을 항복받는 항마(降魔), 깨달음에 이르는 성도(成道),

법을 가르치는 전법륜(轉法輪), 열반에 드시는 입열반(入涅般)은 

사실은 오로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일 뿐,

실제로는 여래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열반>

 

4. 지혜롭고 유능한 의사 아버지의 비유

 

그리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처님은

다시 "지혜롭고 유능한 의사 아버지"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아주 지혜롭고 유능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 의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종류의 약을 만들어 갖가지 병을 치료했다.

그런데 그 의사에게는 자식이 여러 명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다른 나라로 일을 보러 간 사이에

아이들이 부주의하게 독약을 마시고 말았다.

아이들 모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몇몇은 땅바닥에 나뒹굴며 몸부림치고,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의사는 사태를 파악한 즉시

다양한 종류의 약을 만들어 아이들을 치료해주었다.

 

몸과 마음이 상하지 않은 아이들과

영특한 아이들은 아버지를 알아보고 아버지를 믿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주는 약을 순순히 받아먹고

서서히 건강과 안정을 되찾았다.

 

다른 아이들도 오랫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너무 의지한 탓에,

독기로 본심을 잃어버려 아버지가 주는 약을 먹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한 몸이 괜찮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에 약은 나중에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영원히 함께 하리라는 생각에 약 먹을 생각도,

스스로 몸을 추스리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아이들을 보고 의사 아버지는 슬픔을 금치 못했다.

 

매일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 약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유능한 의사는 다시 집을 떠난 척 일을 꾸몄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객지에서 죽었다고 말하게 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애타게 울다가 아버지가 먹으라고 한

약 생각을 하고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누가 이 의사의 방편을 허망하다고 하겠느냐?"

라고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궁극의 차원에서 부처님은 성불한 때는

한량없고 가없는 세월 이전이시고 수명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계시지만,

부처님은 태어나 얼마만큼 사시다가 열반에 드신척 가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교만하고 나태해서

부처님이 늘 항상 옆에 계신다고 하면

수행의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죽었다고 소문내어

아이들이 스스로 약을 먹으려 하는 것과 같이

중생들에게 수행의 길을 보여주고

몸과 마음의 병을 낫는 약을 먹고 치유하기 위해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을 먹고 부지런히 수행해서 궁극의 차원을 만나,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상주하는 부처님의 정체성을 믿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래의 무량한 수명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이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그 순간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영취산 위의 대중들 속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정체성(불신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불은 금생의 일이 아니라,

실은 무량한 세월 이전에 이미 성불한 부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명 또한 무량무변 아승지겁이어서 상주불멸하며,

그동안 사바세계를 비롯한 수많은 세계 도처에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설법함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멸하지 않으면서 열반에 드신 것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자대비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언제나 항상 상주하시고

중생들과 함께 하시면서

무량한 교화와 무량한 자비와 무량한 구제를 계속 하고 계십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적 차원을 뛰어넘는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법화경이 전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정체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