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50) - 구도 열정과 모험의 역경가, 삼장법사 현장(3) - 공부>
1. 인도에 도착한 현장 스님
구마라집 법사처럼 현장 스님도
어학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는 고생 끝에 인도에 도착한 후
인도말을 습득하여
쉽게 인도어를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말하고 쓸 줄도 알았다고 합니다.
현장 스님은 인도에 도착하고 나서
인도말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서북 인도의
카슈미르 지방의 소승 불교 학자로부터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구사론(俱舍論)>,
<순정리론(純正理論)>과 일반학인 논리학과 문법학 등을 몇년간 배웠습니다.
2. 나란다 대학에서 계현 화상과의 만남
그가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 들어간 것은
중부 인도의 마가다 국의 나란다(Nālanda) 사원에서입니다.
나란다 사원은 당시 인도의 불교학도가 모여있던 불교 대학으로
중기 대승불교인 유가행파나 중관학파의 교리를 가르쳤고
당대의 일류 학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수학하는 승려는 4천 명,
그 밖에도 임시로 온 연구가, 재가자,
유학온 타종교인까지 포함하면 모두 1만 명에 달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발굴된 나란다 사원의 유적지를 보아도
이 대학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장 스님은 나란다 대학에서
<계현>이라는 스님으로부터 공부를 배웠습니다.
계현 화상은 당시 106세의 고령이었다고 하는데,
유가 유식의 교학의 대가로서
정법장(正法藏, 올바른 불법을 총망라하여 깨달은 대학자)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뛰어난 승려였습니다.
현장 스님은 계현 화상에게 청하여
먼저 유가행파(유식 불교)의 근본 논서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계현 화강으로부터 5년간 더 청강하여
유가행파의 학설을 모두 습득하였으며 그 밖의 대∙소승의 교학도 배웠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란다 대학에서는
무착(無着)∙세친(世親)의 유가유식학(유가행파)과
용수(龍樹)∙제바(提婆)의 중관학(중관학파)을 함께 연구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파의 학자들은 때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현장 스님도 당시의 중관학자인 사자광(獅子光) 등의
설을 논파한 『회종론(會宗論)』 3천 송을 써서 스승 계현 화상에게 바쳤으며
계현 화상은 그 저술을 매우 칭찬하였을 정도로 공부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남인도에서 소승불교 정량부(正量部)의 대학자가
『파대승론(破大乘論)』 7백 송을 쓰자
계현 화상은 날란다 사원에서 4명의 대표 중에 현장을 선발하여
논파하도록 지시했을 정도로 공부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때도 현장은 『제악견론(諸惡見論)』 1천 6백 송을 지어
소승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논파하여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순세외도(順世外道)'라는 유물론자와 논전을 벌여
40개 조항에 대해 낱낱이 논파하여 정법을 따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현장 스님은 고국인 중국에서 가르침을 널리 펼치라는
스승의 명을 받들어 5년만에 나란다 사원을 떠났습니다.
3. 인도 불교 순례 여행
그런데도, 그의 학구열과 탐구심은 끝이 없어
다시 동인도와 서인도의 여러 지방을 순례 여행하였습니다.
불교 성지 순례를 하면서
부처님의 유적지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특히 부처님의 깨달음의 성지인 붓다가야에서는
불교 성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서인도에서는 정량부(正量部)라고 하는 소승 부파의 교학을 2년간 배웠고
장림산(杖林山)에서는 승군(勝軍)이라는 재가의 대학자에게서
대승의 가르침을 2년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인도를 떠날 즈음 갠지스강 중류지방의
카나우지(曲女城)에 수도를 두고 있던 계일왕이 무차 법회를 열었습니다.
"무차대회"란 5년에 1번씩 종교와 종파를 떠나
많은 종교인들이 모여 법에 대해 논쟁하는 대회로서,
전국에 있는 수많은 바라문과 불교승려들을 초대하여
커다란 건물을 지어서 그곳에 머물게 하고는 종교 논쟁을 벌렸습니다.
무차 법회 이전에 현장 스님은 동북 인도 변경의
카마루파국에 초대를 받아서 쿠마라왕을 위해 불교를 설하고
<삼신론(三身論)>이라는 책을 써서 가르쳤는데,
이 소문을 들은 계일왕이 사신을 보내어 현장을 초대하였습니다.
당시 무차법회는 18일간 담론을 계속되었는데,
여러 바라문들과 불교 승려들이 매번 현장 스님에게 논파당하여
급기야 어느 누구도 논의하려 도전하는 사람이 없게 되어
현장 스님은 "대승천(大乘天, Māhāyanadava)"이라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현장 스님이 인도를 떠나려고 하자
계일왕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왕들이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장 스님의 귀국 결심이
너무나 강고해서 현장 스님을 만류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귀국에 필요한 코끼리와 낙타, 불상, 경전, 식량 등을 풍부하게 주고,
여러 왕에게 소개장을 써서 귀국을 도와주었습니다.
4. 고창국에서의 귀국 허가
현장 스님은 북쪽으로 행로를 잡아 인더스 강을 건너
그가 왔던 실크로드를 통해 귀국하다가 중간에 고창(高昌)국에 머물렀습니다.
그 곳에서 고창 사람 마현지(馬玄智)에게
중국으로 가는 상인을 따라가게 하여
당나라 왕실에 국법을 어기고 인도로 간 것을 사과하고
입국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현장은 그동안 고창 국왕이나
승속의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불교를 강의하며 지냈습니다.
드디어 반 년 남짓 지나서 사자(使者)가 돌아왔습니다.
당나라 왕실은 칙명을 내려서 그의 입국을 허락하고,
고창국왕에게 당나라 입국을 도와주도록 의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장은 20여 마리의 말에
불상과 불경을 싣고 고비사막을 무사히 통과하였습니다.
마침내 정관 19년(645) 정월에 장안의 장관인
방현령의 환영을 받으며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가 현장 스님의 나이 46세였습니다.
현장 스님이 가지고 온 것은 (1) 불사리 150립,
(2) 인도에서 금은과 전단나무로 만든 불상 6구 (3) 경전류 520질 657부였습니다.
이 경전들의 내용을 보면 대승 경전 224부, 대승 논서 192부,
소승부파들의 성전으로서는 상좌부의 경∙률∙논서 15부, 대중부 15부, 정량부 15부,
화지부(化地部) 22부, 음광부(飮光部) 17부, 법밀부(法密部) 42부, 설일체유부 67부,
그리고, 일반학인 인론(因論, 논리학 서적) 36부, 성론(聲論, 문법책) 13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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