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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51) - 구도 열정과 모험의 역경가, 삼장법사 현장(4) - 역경

by 아미타온 2024. 8. 31.

<불교 인물사(51) - 구도 열정과 모험의 역경가, 삼장법사 현장(4) - 역경>

 

<대안탑>


 

1. 당 태종의 후원

 

당 태종 이세민은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 스님을 만나보고

그의 폭넓은 학식과 견문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부디 환속해서 자신을 주위에서

보좌해줄 것을 거듭 간곡히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장 스님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일대의 염원인 번역 사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환속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간곡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당 태종도 마침내 납득하고 죽은 모후를 위해서

장안에 세운 홍복사에 있는 조용한 선원에서 번역을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황제의 칙명에 의해 국가적인 번역 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현장은 귀국한 645년 3월부터 홍복사에서 역경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무는 장안의 총독인 방현령이 마련해주었으며,

전국에서 유능한 승려와 석학들이 역경의 협력가로 모여들었습니다.

 

<대안탑에서 바라본 중국 장안성(서안)>

 

2. 경전 번역(역경) 작업의 시작

 

번역된 경전의 의미가 올바른지를 검증하는 소임을 맡은 승려 12명, 

역경의 문장을 다듬는 소임을 맡은 승려 9명,

문자와 어구가 올바른가를 보는 승려 1명,

역경 중의 범어 범문을 검증하는 승려 1명으로

주요 역경 인원을 선발하였습니다.

 

이 밖에 수많은 필수자(筆受者, 역어를 받아쓰는 사람)를 채용하여

경전 번역 작업에 필요한 인원 선발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와 같은 빈틈 없는 준비로 그 해(645년)에는

<보살장경(菩薩藏經)> 20권, <불지경(佛地經)> 1권,

<육문다라니경(六門陀羅尼經)> 1권,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20권 등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정관 20년(646년)에는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16권이 번역되었고,

인도 구법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12권을 써서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 책은 당 태종이 서역(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사정을

자세하게 알고 싶어했기 때문에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부터 현장 스님은 자신이 인도에 유학간 목적인

유식불교의 유명한 논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도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번역이 완성된 것은 정관 22년(648) 5월이었습니다.

 

현장 스님의 인도 구법 여행의 주된 목적은

<유가사지론> 원본을 배워서 공부하고

중국에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 이 책을 번역하는 데 특별한 정열과 함께

신중을 기하여 2년이라는 기간을 걸려 완성했던 것입니다.

 

<대자은사 부처님>


3. 열성적인 경전 번역

 

649년 당 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이 즉위하였습니다.

 

고종은 650년 현장 스님에게 더욱 큰 절인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세워주고 

대자은사에서 역경에 전념할 수가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현장 스님은 매일 계획을 세워서

번역의 분량을 미리 정하여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안으로 모두 번역했습니다.

 

낮에 용무가 있어서 번역하지 못할 때에는

한밤중에라도 번역하여 밤 10시가 넘도록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 예불을 마치고

12시에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은 4시에 일어나서

그날 번역할 부분의 범본을 읽고 

순서대로 붉은 점을 찍고서 번역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리하여 매일 정해진 양을 번역할 뿐만 아니라,

번역한 부분은 조반 후와 저녁에 두 차례씩

전국에서 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학승들을 위해

강의하거나 질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즉, 법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동안에는 현장 스님은

몸소 건칠(乾漆, 옻나무의 즙을 말려서 만든 약) 등으로

불상 200여 구 제작하였고,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 몰려든 관리나 도속(道俗)을 위해

보살계를 주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한, 왕실의 관계를 비롯한 갖가지 잡무도 있었습니다.

 

그런 바쁜 와중에서도 50세를 넘긴 현장 스님은

조금도 지치는 일이 없이 정력적으로 번역을 계속하였습니다.

 

현장은 불경을 역경하면서도

불교 이외에 인도의 논리학이나 외도의 철학서들도 번역하였습니다.


당 고종과 그의 왕비인 측천무후는 해가 갈수록

현장 스님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으며

현장 스님을 위해 서명사(西明寺)를 세워 주었습니다.

 

< 장안의 대자은사에 세워진 현장 스님 동상 >

 

4. 대반야경의 번역

 

그러나, 수도 장안에 살면 잡다한 용무가 많았습니다. 

 

659년 10월에는 그의 최후의 번역의 대사업인

<대반야경> 600권 번역을 위해서

황제에게 청하여 수도에서 떨어진 옥화궁을 사용하였습니다.

 

<대반야경>은 산스크리트의 원본(범본) 20만 송(640만 자)로 이루어진 

모든 한역경전 가운데 가장 양이 방대한 경전입니다.

 

현장 스님은 이미 62세가 되었으므로

<대반야경>의 번역에 말년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대반야경>의 범본으로서 세 종류를 갖고 왔기 때문에,

세 종류의 인도 범본을 비교하며 번역을 진행했습니다.

 

경문이 너무나 방대하고 더구나 반복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제자들은 종종 옛날 구마라집 법사가 했던 것처럼

중국인의 기호에 맞게 중복을 피하고

내용 중심으로 번역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장 스님도 그 의견을 따라

처음에는 간추려서 번역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현장 스님은 잠을 자면서

온갖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험준하고

위험한 산을 오르거나 맹수에게 습격당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전율하면서 꿈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하며 결

국 원전을 생략하지 않고 직역하여 그대로 번역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꿈 속에서 불보살님이 나타나서

미간에서 빛을 놓으시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울러, 현장 스님은 향기로운 꽃과 밝은 등불로

불보살님을 공양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대중에게 설법한 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받고 찬탄받으며

감미로운 과일을 보시받는 길몽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대반야경>은 한 자도

빠짐없이 원전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세 종류의 원본을 대조하여 마무리 지었습니다.

 

<대반야경>을 번역하면서 현장 스님뿐 아니라,

함께 했던 제자들도 여러 가지 길몽과

길상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옥화궁의 번경전(飜經殿) 곁에 있는

망고나무가 때아닌 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현장 스님은 이제 당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번역에 더욱 정성을 쏟아 밤을 낮 삼아 정진하였습니다.

 

그래서, 663년 10월 말 <대반야경> 600권을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실로 4년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번역이 끝난 날 현장은 매우 기뻐하며 합장하고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반야경은 중국에 큰 인연이 있다.

내가 이 옥화궁에서 역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경전의 힘이다.

앞서는 수도에서 잡무에 쫓겨 도저히 하지 못했지만 지

금에야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오직 모든 부처님의 가피와 용천(龍天)의 도움 때문이다.

이 <대반야경>은 국가를 호위하고 지키는 경전이며 인간과 천상의 큰 보물이다."

  

우리는 <대반야경> 대신에 <대반야경>의 요점을

260자로 간결하게 나타낸 <반야심경>을 읽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독송하는 <반야심경>도 현장 스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법회 의식 때마다 독송하는 <반야심경>도 현장 스님 덕분에 독송하는 것입니다.

 

<대반야경>의 번역이 끝난 다음해인 664년 정월 초하루에 

제자들은 현장 스님에게 <대보적경(大寶積經)> 번역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스님은 이 방대한 경전을

번역할 기력이 없음을 알고 몇 행만을 번역하고는 중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2월 5일 밤에 65년의 찬란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현장 법사가 역경 작업을 한 장안의 대자은사 대탑 >

 

5. 법을 향한 보리심

 

현장 스님의 일생은 현실의 안락함보다는

법을 위해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적 삶이었습니다.

 

경전을 번역하는 준비 작업이나

일일 번역양을 정해놓고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보면

현장 스님이 후학들을 위한 경전 번역 작업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최선을 다해 번역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 공부나 수행을 할 때도 

현장 스님처럼 계획성있고 실행력 있게

열정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 스님의 열정과 모험의 삶은

보리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불법의 진리를 알고 싶은 열망,

그 열망을 위해 두려움없이 도전하는 모험심!

 

썪은 물에 부초처럼 떠다니다 죽는 인생이 아니라,

법을 향한 뜨거운 구도열정과 함께 

그 열정을 구현하기 위해 새롭게 길을 개척하는 모험심,

이것은 바로 진리를 향한 보리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 스님의 치열한 삶을 통해 보리심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