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15) - 일엽 스님을 통해본 법장 보살의 출가>
1. 환희대와 원통보전
제가 가끔 가는 도량 중에 예산 수덕사가 있습니다.
수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멋진 대웅전이 있는 도량이고,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의 제자 만공 선사가 주석했던 '덕숭총림' 본산입니다.
수덕사 천왕문 왼쪽으로 가면 '환희대'가 있습니다.
환희대는 만공 스님의 비구니 제자인 일엽 스님이 삭발 출가하여 수도한 장소입니다.
환희대는 원통보전이 중심 전각이고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처음 원통보전에서 이 관세음보살님을 뵈었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힘있고 엄정한 기운이 돋보이는 관세음 보살님이라서 참 좋았습니다.
멋진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환희롭게 절 하라고 '환희대'라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희대 원통보전 앞에는 일엽 스님의 제자인
월송, 정진 두 스님이 스승 일엽 스님을 기리기 위한 코끼리 보탑이 있습니다.
원통보전의 엄정한 기운의 관세음보살님과 코끼리 보탑을 보고
일엽 스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2. 일엽 스님의 치열한 삶
1933년 입산 출가한 일엽 스님은 만공 스님의 가르침 속에서
30여년간 환희대에서 참선을 하며 비구니 제자들을 지도했습니다.
선방에서 죽비를 치면서 참선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선방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보직을 '입승(立繩)'이라고 합니다.
일엽 스님은 30여년간을 입승직을 맡아
매일 제자들과 함께 참선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열심히 공부한 일엽 스님.
일엽 스님(1896~1971)의 출가 전 이름은 김원주입니다.
김원주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잡지 <신여자>를 출간하여
여성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언론인입니다.
대전 MBC에서 일엽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청춘을 불사르고(시대의 벽을 넘은 여성) - 일엽 김원주>라는 프로입니다.
(보시고 싶으신 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eYm8cXOE8-8 를 클릭하세요)
이 프로를 보고 일엽 스님의 인생 편력에 대해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습니다.
고아로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운
그녀의 삶이 한편으론 가엾게, 한편으로는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청춘을 불사르고 참다운 나를 찾는
영원한 청춘의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그녀의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량수경>에 나오는 사문 법장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량수경>에는 한 나라의 국왕이 세자재왕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이라는 사문이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국왕'이라는 세속적 삶을 살던 거사가 어떻게 발심 출가하여 사문 '법장'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 불국토를 만들어 중생들을 인도하기 위한 5겁 사유의
큰 마음 세계를 갖게 되었을까요?
경전만 보면 우리는 '부처님이니까~"라고 무심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큐>와 시집을 통해 읽은 일엽 김원주의 삶과 고뇌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문 법장의 삶과 고뇌의 무게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세상과 맞서 싸우던 여성해방론자 김원주는
어떻게 발심출가하여 비구니 일엽 스님이 되었을까요?
혼자의 깨달음이 아닌 비구니 도반들과 후학들을 위해
30여년간 입승직을 맡았던 수덕사 환희대 선방이
그녀에게는 작은 정토가 아니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문 법장과
비구니 일엽의 길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3. 일엽 스님의 어린 시절
일엽 스님 김원주는 평안도 출신입니다.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개신교 목사의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 6년만에 얻은 딸은 아들 못지 않은 후원 속에 자랐으며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개화된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골에는 여자가 학교에 다닐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저 딸 하나 훌륭하게 만들어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주변의 비난과 가난 속에서도 바깥 일을 하며 악착 같이 돈을 벌어 딸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나, 김원주의 나이 12살 때 결핵을 앓던 어머니는 남동생 출산 후에 세상을 떠났고,
동생도 3일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업어 키우던 바로 아래 동생마저도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을 접한 그녀는
비통한 마음으로 '동생의 죽음'이란 시를 지었습니다.
"업으면 방글방글
내리면 아장아장
귀여운 내 동생이
어느 하루는
불 때논 그 방에서도
달달달 떨면서 누웠더니
다시는 못 깨는 잠 들었다고.....
엄마 아빠
울고 울면서
그만 땅 속에 영영 재웠소.
땅 밑은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고 하지만.....
아아, 가여운 나의 동생아!
언니만 가는 때는
따라 온다 울부짖던
그런 꿈 꾸면서 잠자고 있니?
내 봄에 싹트는 움들과 함께
너 다시 깨어 만난다면이야
언제나 너를 업어
다시는 언니 혼자
가지를 아니하꼬마...."
(동생의 죽음)
12살 소녀가 쓴 시라고는 믿기지 어려울 정도로
동생에 대한 깊은 사랑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는 시입니다.
이 후 재혼한 아버지도 그녀가 17세 되던 해에 병으로 죽게 되면서
동생들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그녀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 사랑하는 부모와 동생들과
사별해야 했던 아픔 속에서 자라나야 했습니다.
4. 일엽 스님의 젊은 시절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21살에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간호원 강습 과정을 수료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일본 도쿄는 신여성들이 새로운 삶을 펼치고 있었고,
여성 계몽을 위한 잡지나 강연회가 많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여성의 삶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그녀는 첫사랑을 만나게 되니 일본인 청년 오다 세이조입니다.
그들은 서로 결혼을 하려 했으나 당시의 정세로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다.
결국 양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딫혀 무너지고만 첫사랑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만 남기게 됩니다.
아무튼 첫사랑의 아픔 속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는
가족의 중매로 연희 전문학교 교수와 결혼하였습니다.
남편의 지원과 이화학당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을 받아
나혜석,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조선 최초의 여성 종합지 '신여자'을 발간합니다.
'신여자'는 당시 암울한 여성의 현실 속에서
여성의 계몽을 목적으로 만든 잡지였습니다.
집필진이 모두 여성으로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인권과 자유 해방을 부르짖었습니다.
김원주는 '신여자'의 편집장으로 가장 많은 시와 글을 쓰고,
여성들의 깨어남과 인권과 자유를 위해 세상이 동참해줄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아~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모든 헌 것을 거꾸러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울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죄, 모든 악이 사라질 때가 왔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개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개조하여야겠습니까?
무엇 무엇 할 것 없이 사회를 개조하여야 하겠습니다.
시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가정의 주인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신여자 창간호)"
위 두 그림은 <신여성 김원주의 하루>라는 목판화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세 여류 화가인 나혜석은
일엽의 절친으로 <신여자> 잡지에 김원주의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손으로는 바느질, 머리로는 신여자 잡지 살릴 생각
밤새껏 고민하여 새벽 정신에 원고를 쓰고
이 짧은 밤에도 열두 시까지 독서
부글부글 푸푸 밥을 지으며 시를 쓰고...."
김원주는 얼마나 <신여자> 잡지에 공을 들이고,
열심히 고뇌하면서 시와 글을 쓰고 노력했는지를
이 목판화에 드러난 일엽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희 전문 교수였던 남편은 그녀보다 15살이 많았고,
의족을 한 장애인임을 숨기고 결혼했던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생기지 않았고 결혼 생활 자체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되었는데,
세상은 '남편을 버리고 이혼한 여자'라는 주홍글씨를 일엽에게 씌웠습니다.
세상의 비난이 거세지고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잡지 '신여자'는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김원주는 화가 나혜석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新)정조론'을 주장하며 개화기 여성 운동을 펼쳤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죄악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만 정조가 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정조에 대한 의무 또한 소멸된다."
오늘날에는 상식인 이 주장이
당시 사회의 가치관 속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큰 비난이 그녀에게 쏟아지고,
사랑을 찾아 몇 번의 결혼은 세상의 가십 거리로 조롱받았습니다.
그 속에서도 그녀는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굽하지 않고,
자신의 글을 쓰고 자신의 시를 썼습니다.
5. 일엽 스님의 출가와 수행 생활
그리고, 만공 선사의 법문을 듣고 감동하여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참된 구원은 나의 근본을 알아
'나'를 찾아 자유인이 되는 것에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심조(唯心造)'로서의 마음이 주인이며,
달마(다르마,법)에 입각한 자유 의지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38살이던 1933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를 결심합니다.
만공 선사를 스승으로 삼아 참된 마음을 찾는 선 수행자가 되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만공 선사는 김원주(일엽 스님)의 출가를 받아주었습니다.
만공 선사는 일엽 스님에게 '글도 망상의 근원'이라는 가르침을 주어 절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롯히 마음을 닦는 화두 참구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후일 만공 선사는 일엽 스님에게
'하엽당 백련도엽 비구니(荷葉堂 白蓮道葉 比丘尼)'라는 당호를 내립니다.
"일엽이 연꽃처럼 되고 성품도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고 깨달음을 인가했습니다.
일엽 스님은 스승인 만공 선사의 가르침 속에서 비구니 스님을 위한 선방을 만들고
30여년간 일승 소임을 맡아 선방의 규율을 지키고 비구니 스님들을 지도했습니다.
1962년 일엽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과 소통했습니다.
6. 일엽 스님을 통해 본 법장 비구의 출가
일엽 김원주.
그녀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깨인 부모를 만나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와 동생을 일찍 잃는 고통 속에서도
당시 암울했던 여성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당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의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웠고
여성들이 스스로 깨어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국왕 법장의 삶과 고뇌 또한 어땠을까요?
백성들의 고통, 괴로움을 보고 많은 고뇌가 있지 않았을까요?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가 들어
허망하게 죽는 백성들을 보며 마음 아팠을 것이고,
흉년에는 아귀가 되어 덤비는 백성들,
전란의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는 사람들
이 속에서 어떻게 백성들을 지키고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끊임없이 궁구했던 왕이었을 것입니다.
일엽 스님이 만공 선사의 가르침을 통해
'일체유심조'의 내 마음의 성품을 깨달아
참된 자유인을 서원하며 출가하신 것처럼
법장 또한 세자재왕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의 확고한 동기를 갖고 출가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자유와 해방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와 평화를 얻는데 있슴을 자각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서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 보살로서 당신 혼자의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겠다는 큰 서원을 발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국토가 아니라 전 우주의 모든 중생들을 인도할 수 있고
누구나 최상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온전히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최상의 거대한 불국토를 만드시기를 서원하고 또 서원했을 것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가 없는 나라,
잘 나고 못 나고 강하고 약한 차별이 없는 나라,
육신통을 구족하여 수행을 위해 자유자재하게 오갈 수 있는 나라,
극락에 있는 자체로 번뇌는 생기지 않고 오롯히 구도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나라...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불국토를 꿈꾸며
무수한 몸을 받으며 5겁 사유를 통해
극락의 설계도인 48대원을 확고하게 완성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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