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63) - 유식 불교(11) - 가행위>
1. 가행위와 4심사관
유식의 5가지 수행의 단계 중에 가장 독특한 것이
2번째 가행위(加行位) 입니다.
가행위는 유식 수행의 가장 핵심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행(加行)"이란 힘을 더하여 더욱 가열차게 정진한다는 의미입니다.
첫단계인 자량위는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예비 단계입니다.
두번째 가행위(加行位)는 '4심사관(四尋思觀)'이라는 관법을 통해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서 견도(見道)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가행위에서의 닦음과 관법을 통해해 유식의 본성(유식성)에 머무는
제3의 통달위(견도위)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먼저, 4심사관(四尋思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4심사관은 4가지 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유하는 관법입니다.
4가지 법이란 명칭(名), 사물(事), 자성(自性), 차별(差別)을 말합니다.
4심사관은 명칭이나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이나 사물을
그 대상이나 사물로부터 분리하여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명칭은 명칭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따로따로 분리하여 관찰하여
명칭이나 사물, 명칭으로 파악되는 사물,
그 사물의 성질 등은 임시적 존재로서 실재하지 않으며,
마음의 산물로서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철하게 보는 관법입니다.
2. 명심사관과 명칭
첫번째가 명(名)심사관 입니다.
명심사관은 명칭(名)을 사물과 별도로 분리하여
우선 그 명칭과 언어에 의식을 집중하여 추구하고 사유하며 관찰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이나 사물을 인식할 때 갖가지 명칭으로 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칭과 언어는 객관적 사물인 인식 대상과 일치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즉, 명칭과 언어에는 그에 대응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명심사관은 이러한 우리의 언어적 인식의 현주소를 꿰뚫어 보는 관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나 명칭이 객관적 사물을 지시한다고 믿고 있는데,
사실 언어는 객관적인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생각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책을 놓고 보려는 의도가 있으면 책상이지만,
같은 상이라도 밥을 먹으려는 의도가 있으면 밥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이란 책상이라는 객관적인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책을 보려는 의도가 있을 때
그 의도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물건일 따름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언어나 명칭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을 건네 주는 뗏목처럼
언어는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와 생각을 반영하고 전달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이라는 명칭은 단지 명칭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명칭은 일종의 문법적 용법에 따라 사용한 언어 도구요,
일종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도출한 유용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명칭이나 이름은 사람들의 의도와 삶의 경험을
고정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아울러 사람들이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산물의 형태로
문화나 사회 방식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실체를 갖지 않는 표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칭은 실재하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마치 강을 건네주는 뗏목과 같이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도를 전달해 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부처님께서
"나의 말은 저 뗏목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씀과
선사들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씀처럼
명칭과 언어에 집착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 사심사관과 사물
두번째가 사(事)심사관 입니다.
사물(事)는 사물 또는 사물의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
인식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물에 의미나 개념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물과 사물의 의미는 우리의 인식 작용에서는 분리될 수 없는 결합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물의 의미와 사물의 실체에 대해
깊이 관찰하고 사유하며 통찰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을 대상으로 살펴봅시다.
책상이라는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하는가요?
책상이라는 사물은 우리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그 무엇(실체)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책상은 우리의 인식에 따라 책상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인식한 색깔과 모양, 코로 인식한 향기,
혀가 인식한 맛, 몸이 인식한 촉감 등
5가지 감각기관(5근)이 각각 개별적인 경계를 대상으로 인식하면,
제 6의식기관(의근)이 이들이 인식한 내용을 종합하여
자신의 경계로 만들어서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상에 대해 눈이 인식한 색깔과 모양,
코가 인식한 향기, 몸이 인식한 촉감 등을 의근이 종합하여
윗쪽이 판판하여 책을 놓을 수 있고,
아래에는 책상다리가 있는 등등의 특징을 갖는 물건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눈으로 책상을 보지 않아도
머리 속으로 책상을 인식할 수 있고,
책상을 생각하면 그것이 책을 놓고 볼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의근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책상은 5근을 통해 인식한 것을
제6의 의근이 종합하여 우리의 마음에 하나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책상뿐 아니라 다른 삼라만상도
우리의 5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한 모습, 소리, 향기, 맛, 촉감을 종합하여,
사과나 나무나 갑돌이 등등 삼라만상을 만들어서
자신이 만든 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그것이 외부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육근)이 만들어놓고 이를 통해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찰하면 '책상'이라는 사물은
마음과 인식의 산물로서 마음이 변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책상'를 포함한 사물은 실체로서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연기의 소산으로 여러 조건에 의하여
임시적으로 존재 형태를 띄고 있는 가합(假合)된 것이라는 것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렇게 명칭과 사물을 추구하고
사유하고 관찰하는 관법이 무르익으면
명칭과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마음과 인식의 산물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명칭과 사물은 1대 1로 대응한다는
우리의 소박한 인식의 일상성에서 탈피하여
더 이상 명칭에 집착하여 헤매는 삶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며,
사물 역시도 집착할 대상이라는 망집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4. 자성심사관과 자성
세번째의 자성(自性) 심사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성은 자체성, 독립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명칭과 사물이 결합하여
구체적으로 인식되는 사물이
그 자체성과 독립성이 있는지를 추구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명칭과 사물이 각각 자성과 실체가 있지도 않은데,
명칭과 사물이 결합한 것이 어떻게 자체성과 독립성이 있을까요?
자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가립(假立)된 것으로 오로지 허망 분별만이 있습니다.
5. 차별 심사관과 차별
네번째 차별(差別) 심사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칭과 사물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명칭과 사물의 갖가지 차별상이 어떻게 존재할까요?
마땅히 차별도 가립(假立)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4심사관에 의하며
명칭과 사물, 자성과 차별이 단지 마음의 산물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4심사관이 명칭과 사물의 이해를 통한
참된 진리에의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진리에의 접근은 우리가 처한
현실 상황에 대한 예리한 파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명칭과 사물에 집착하여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 상황입니다.
즉, 명칭과 명칭이 의미 부여를 한 사물을 집착하고 헤아리고
추구하는 길에서 깊은 번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 삶인 것입니다.
우리 현실의 괴로움은 그 출발이
명칭이나 언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리한 우리 현실의 파악 위에서 4심사관은
'명칭과 사물의 1대1 대응'이라는 연결 고리를 부수어 버리자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 차원의 언어나 명칭에 대한 집착을 분쇄하여
명칭과 사물은 동일한 체가 아니며 동일물이 아니라는 이
해를 통해 참다운 지혜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 차원의 언어 체계를 해체하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언어 체계를 재형성해 나갑니다.
이것이 유식철학을 다른 말로 '언어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유식 철학은 현실 삶을 파악하는 것도 언어요,
그 현실 삶을 뛰어넘어 해탈의 길로 가는 것도
언어의 이해에서 찾습니다.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유식의 깊은 진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면
유식의 깊은 도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4심사관을 닦음으로써
4가지 지혜를 얻는 것을 4여실지(四如實智)라고 합니다.
'여실지'는 명, 사, 자성, 차별이 다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마음을 여의고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4여실지를 얻으면 허망분별심을 여의고
유식성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4심사관과 4여실지는
유식을 수행하는 가장 기본 방편으로서
아직 택법(擇法)이 되지 않았을 때를 '인위(因位)'라 하고
관(觀)에 의해서 지(智)가 생기고 일체법을 결정적으로 이해하여
성공의 결과에 도달하면 '과위(果位)'라 합니다.
4심사관을 닦아 명, 사, 자성, 차별이 모두 유식에 의해 생긴 것이며,
방편으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식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지혜가 '여실지(如實智)'입니다.
유식 수행자는 제2 가행위에서 4심사관을 닦아서
4여실지를 얻어 일체의 허망분별심을 여의는 것으로 정진해 나갑니다.
그래서, 가행위 수행이 유식 수행에 있어 가장 독특한 점이며
중요한 단계라고 말해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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