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풍류 기행

풍류 기행(22) 안동 이육사 문학관

by 아미타온 2024. 12. 10.

<풍류 기행(22) 안동 이육사 문학관>

 

 

1. 민족 시인, 이육사 선생

 

안동 이육사 문학관.

 
 

안동 이육사 문학관은

이육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 있습니다.

 

이육사 선생이 결혼후 사셨던 대구에도 이육사 문학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육사 생가와 묘소, 그리고 고향 마을이 남아 있는 안동에서

이육사 선생을 만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이육사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으로

어린 시절 퇴계 선생의 유학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습니다.

 

퇴계 선생의 선비 정신을

일제 시대 암흑기의 시대 상황에서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독립 정신으로 승화하여

어둠의 시대를 뜨거운 가슴으로 사셨던 독립투사이자 민족시인입니다.

 

44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사셨지만,

17번의 감옥 생활이 말해주듯 

고난의 삶 속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의롭게 사셨던 훌륭한 분을 만날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2. 금강심

 

문학관에 들어서면

이육사 선생의 꼿꼿한 문학 정신을

나타낸 수필 <계절의 오행>의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속에서

나의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쓰겠다는

이육사 선생의 치열한 문학 정신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청포도>, <광야> 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이육사 선생입니다.

 

일제 시대 때 의열단과 독립군 활동을 하셨던 투사로

생의 마지막을 중국 북경의 감옥에서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유품 중에 이육사 선생이 그린 난초 그림이 있다.

 

시만 잘 쓰신 것이 아니라,

난초 그림도 잘 그리셨다.

 

한 평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셨던

이육사 선생이 남긴 난초 그림이

이육사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나타내는 난초라서 특별했습니다.

 

 

 

3. 이육사 선생의 생애

 

이육사 선생은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이육사 선생의 본명은 원록이고,

형제들도 모두 독립 투사였습니다.

 

이육사 선생은 처음에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1925년 20대 초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습니다.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습니다.

 

 

이원록의 필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육사'입니다.

 

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1929년 이육사 선생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 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이육사 선생이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육사(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육사(戮史)'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육사(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받아들여 '육사(陸史)'로 바꿨다고 합니다.

 



이육사 선생이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부터입니다.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습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중국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고,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면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 시인과 독립 투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육사 선생의 시는 대부분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이육사 선생은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장례식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시로는 <청포도>, <황혼>, <절정>, <광야>, <꽃>, <교목>이 있습니다.

 

 

4. 광야

 

이육사 문학관에는 안내사 님이 계셨습니다.

시를 쓰고 이육사 문학 동호회를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육사 문학관에 오면

이육사 선생의 올곧은 삶과 문학정신을 담은

0분 분량의 이육사 선생의 영상을 뵈야 한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이육사 선생이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어떤 가치를 향해 사셨으며,

어떤 올곧은 문학 정신으로 사셨는지를 선명하게 알수 있는 영상이었습니다.

 

일제가 얼마나 악날하게 독립투사들을 괴롭혔는지,

그 속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살아간

이육사 선생의 독립 정신의 올곧음을 새롭게 자각할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육사 선생의

<청포도>,<광야> 같은 시는 외울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다른 시인들에 비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선명했고,

뜨거운 힘이 느껴지는 시라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영상을 통해

이육사 선생의 삶과 시는 하나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육사 선생의 고향 마을이 인상 깊었습니다.

 

큰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

이육사 선생이 생의 마지막에 쓰신 '광야'처럼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5. 절정

 

안내사 님은 이육사 선생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 대해 설명해 줘서 유익했습니다.

 

이육사 선생의 따님이신 이옥비 여사가

바로 앞 목계 종택에 살고 계신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시원시원하신 분이라고 해서

나중에 기회되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튜브로 이옥비 여사를 보니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이 아주 크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문학관 입구에는 이육사 선생의  <절정> 시비가 있습니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유홍준 교수의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직접 와서 이육사 선생에 대해 알게 되니 보이고,

보니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육사 선생의 <절정> 시의 마지막 구절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싯구가 인상 깊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속에 강철로 된 무지개의

단단한 기백으로 사셨던 분이 이육사 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육사 선생의 묘소입니다.

 

일제의 고문 끝에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한 후

화장 후 남은 유골만 동생에게 인계해서 봉분이 없습니다.

 

유골을 화장한 표식만 남아 있는 소박한 무덤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며 살려면

얼마나 단단한 마음과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할까?

 

정말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삶을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관 바로 옆에 이옥비 여사가 사신다는

목계고택이 있어서 걸어 보았습니다.

 

 
 

 

원래 이육사 선생의 생가터에는

<청포도>시와 함께 청포도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안동댐 수몰과 홍수 위험으로

이육사 선생 생가를 현 문학관 쪽으로 옮겨 복원했습니다.

 

겨울의 강철 무지개 같은 이육사 선생의 삶이 깃든

이육사 문학관과 고향 마을을 거닐면서 

저도 올곧은 정신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