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126)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의 게송 이야기>
여기에 나오는 게송 두 편은
싯달타 태자가 최정각을 이루시어
부처님이 되시는 순간의 장엄스럽고
영광스러운 감회를 토로하신 깨달음의 시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난 존자의 요청에 따라 다시 반복해 주신 것이다.
싯달타 태자는 고타마의 가계로서
샤카(석가) 족으로 크샤트리아(왕족) 계급이었으며,
아버지 숫도다나 왕과 어머니 마야 왕비 사이에 첫아들로 탄생하셨다.
태자는 태어날 때 아주 특출한 아기로서의
신비롭고 기적적인 면을 보인바 있었다.
이는 태자가 단순히 금생에만 공덕을 쌓은 것이 아니라,
수없이 긴 세월을 두고 많은 공덕을 쌓아 왔고
이제는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태자에게는 태자로서 장차 한 나라를
다스릴 영화가 보장된 탄생이었을지라도,
그보다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과,
그 과정에서 만나는 엄청난 고통과 번민,
노쇠와 불합리가 더 중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태자는 나이 스물 아홉이 되던 해,
(그때는 결혼하여 귀여운 첫아들을 얻고 있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세상의 모든 명예와 왕실의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수행자가 되었다.
수행자 고타마는 그 후 진리를 찾기 위해
육 년 동안 갠지즈 강의 기슭을 따라가며
당시의 유명한 모든 수행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통달하였다.
그러나 끝내 궁극적 목표였던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었다.
그는 엄격하고 규칙적이며 맹렬하게 육신을 학대하는
고행자로서의 길을 가려고 초인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관습에 불과한 것이었고,
형이상학적이어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태자는 고행을 버리고
자기만의 길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리라 결심했다.
이때 태자는 지나치게 호화롭게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지나치게 자기를 학대하며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 둘을 다 버리고 중도(中道)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가장 평화롭고 고요하며 지나침이 없는
이 중도만이 현실에 부합하는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이 중도(中道)를 가게 되면 완전한 평화인
니르바나(열반;涅槃)에 이르게 되는데,
중도는 구체적으로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팔정성도;八正聖道)로써 설명되었다.
팔정성도는 다음과 같다.
(1) 정견(正見) - 사물의 실상을 바르게 봄.
모든 현상에 대해 무상과 무아의 실상.
(2) 정사(正思) - 바르게 생각을 함.
(3)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함. 거짓, 험담, 이간질, 비방을 안함.
(4)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함. 선업을 쌓는것.
(5) 정명(正命) - 바른 직업에 종사함. 노예 매매, 무기, 술, 독약,
관에 시체 담는 직업을 취급 안함.
(6) 정정진(正精進) - 바르게 노력함.
(7) 정념(正念) - 바르게 마음 집중을 수행함.
(8) 정정(正定) - 바르게 삼매(三昧)에 듬.
여기에 제시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은
수행자만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당연한 길이자,
최상의 길로서, 사회의 길이며, 인류의 길인 것이다.
누구나 이와 같이 치우침 없이 바르게 살아감으로서
진리가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싯달타 태자는 이 같은 진실을 깨달으시었다.
태자는 이같이 위대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얻으신 다음
그날 저녁 때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에 으뜸가는 깨달음을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성취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날 밤 초경(7~10시)에
과거 전생을 아는 지혜인 숙명통(宿命通)을 성취하시었고,
이경(10~12시)에는 모든 물체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보실 수있는 천안통(天眼通)을 성취하시었다.
또 삼경(12~3시)에는 중생들이 태어나고 죽은 윤회의 법칙을
일어나는 순서와 사라지는 순서에 따라 자세히 아셨다.
그리고 새벽 네 시경 먼동이 터오는 즈음
당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을 관찰하는 지혜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四聖諦)를 깨달으셨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고성제(苦聖諦) : 고통의 현존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2) 집성제(集聖諦) :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
(3) 멸성제(滅聖諦) : 고통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4) 도성제(道聖諦) :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진리.
이와 같이 모든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께서는
그 이외에도 성스러운 진리의 특성에 관한 지혜,
진리의 활용에 필요한 지혜, 진리를 활용하여 결과에 달성시키는 지혜,
일체 현상의 근본을 통찰하는 지혜를 다 갖추시게 되어
이때부터 완전하게 깨달으신 분(삼먁삼붓다, 정등각자;正等覺者)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며,
"고따마 붓다"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12가지 관점에서 명확하고 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부처님이야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스스로 성취하신 분으로서
모든 인간계와 천상계, 그리고 브라흐마 세계까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으뜸가는 성인이시며, 스승이요, 붓다이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을 이루시는 순간
다음 게송 두편을 읊으셨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苦)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번뇌)는 부서졌고
대들보(무명)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니르바나(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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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명 6신통
부처님의 깨달음의 성지는 붓다가야입니다.
우리 불자들에게 붓다가야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곳으로
많은 불자들이 그 깨달음의 기운을 받는
유서깊고 환희로운 불교 성지 중 제일의 성지입니다.
이번 법구경 이야기는 바로 그 붓다가야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게송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연기법에 입각한 4성제를 깨달으심과
3명 6신통을 얻으심에 의해 정각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3명(明)"은 번뇌를 소멸한 누진통,
중생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수 있는 숙명통,
시방세계 중생들이 어디에 있건 그 인연을 볼 수 있는 천안통입니다.
6신통은 3명인 누진통, 천안통, 숙명통 외에
천이통, 타심통, 신족통을 합한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법에 입각한 4성제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에는
3명 6신통이 있었슴을 알아야 합니다.
이 중에서 누진통에 주목한다면
번뇌를 다한 사람만이 번뇌가 있는 사람들의 번뇌를 볼 수 있습니다.
최소한 번뇌가 옅으진 사람의 눈에는
번뇌로 고통받는 사람의 번뇌가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5비구나 왕이나 장자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을 빠른 시간에 제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들에게 4성제로
이해시킨 것으로 제도한 것이 아니라,
3명 6신통으로 중생들 각각의 근기와 번뇌를 보시고
이에 입각한 대기(근기에 맞는) 설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명 6신통은 신통력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부처님의 중생 제도적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2. 갈애와 집착
우리는 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깨달음을 향한 치열함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갈망과 집착이라는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를 4성제에 적용시켜가며
수행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수행의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법구경의 많은 이야기에서 나오듯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죽음의 문제로,
재물에 대한 욕망이 문제인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망의 문제로,
집착과 분노가 문제인 사람은 집착과 분노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고통을 낳는 문제를 4성제로 적용해가며 수행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속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집착,
고행에 대한 수행자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으로
해탈의 길을 가지 못하는 많은 존재들을 위해
8정도라는 중도의 길을 제시하며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신 것입니다.
"집을 짓는 자"는 바로 이 "갈애와 집착"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갈애와 집착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밝히고
이 모든 번뇌와 무명을 뿌리뽑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다운 지복과 행복의 경지인 해탈을 이루신
해방과 환희의 감격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저 통쾌한 게송의 그 날을 향해 나아가는
부처님의 참된 아들, 딸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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