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69) - 신앙의 불교(5) -바른 정토 신앙인의 자세>
1. 타력 신앙
극락 정토 신앙은 아미타 부처님이 성취하신
서원의 힘(本願力, 본원력)에 의지하는 불교 신앙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의 힘에 의지하는 극락 정토 신앙을
흔히 '타력(他力) 신앙'의 문이라고 합니다.
초기 불교의 전통에서도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공양에 포함된 신앙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미타 부처님을 비롯한 불보살님을 향한
대승 불교 신앙의 모습은 초기 불교 전통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승 불교의 아미타 부처님 신앙과 같은
신앙적 형태의 불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 왕생 신앙은
초기 불교에서 명상과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지성과 명상을 통한 통찰력으로 꿰뚫어
자신의 힘(자력, 自力)으로 해탈을 추구하던 방식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불교에서 우리(중생)들은 사유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능력인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력적인 명상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해가는 것이
올바른 불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신앙적 형태가 두드러지는 대승불교,
예를 들어 아미타불의 정토 왕생 신앙, 관음신앙, 지장신앙 등의
불보살님을 신앙하는 형태를 비불교적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2. 자성미타 유심정토
일부에서는 아미타불 신앙을 신앙적 면보다는
선정 수행의 방편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의 견해입니다.
자신의 성품이 곧 아미타불이고, 청정한 마음이 곧 정토라는 입장입니다.
극락정토와 아미타 부처님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우리의 마음 자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극락정토를 찾을 때
밖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거나 서방의 극락정토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청정한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고 극락정토를 찾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망상으로 가득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선정 수행의 방편으로 염불을 바라보아야지
실체로서의 극락과 아미타불에 의지하는 타력적 신앙의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미타불 신앙을 비불교적으로 바라보거나,
유심정토적 견해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3. 용수보살의 이행도(쉬운 신앙의 길)
용수 보살이 <화엄경> 십지품에 대해 주석한
<십주비바사론> 속에 <이행품(易行品)>이 있습니다.
<이행품>은 불교에서의 신앙적 측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행품>에는 "보살행을 닦는 이의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경지에 듦"을 논한 부분이 있습니다.
용수 보살은 대승의 보살도를 육로로 걸어가는 어려운 길과
해로로 배를 타고 가는 쉬운 길의 2가지로 비유했습니다.
육로로 걸어가는 길을 난행도(難行道)로,
해로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이행도(易行道)로 구별했습니다.
난행도는 홀로 험한 육로로 걸어가며
힘든 길을 헤치고 뜨거운 햇빛과 비바람을 만나며 가는 힘든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에 걸쳐 홀로 자력으로
뼈를 깎는 힘든 수행을 함으로써 불퇴전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반면 이행도는 해로(바닷길)로 배를 타고
배에 의지하여 즐겁고 쉽게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신방편(信方便)의 쉬운 수행,
곧 불보살의 서원의 힘(본원력)의 배에 의지하고
이러한 불보살의 명호를 외워서
그 서원과 공덕의 힘에 의지하여 현생에서 불퇴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용수 보살님이 말씀하시는
불보살의 명호란 아미타 부처님 한 부처님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의 명호를 외우는 것입니다.
4.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용수보살은 아미타 부처님에 대해서는
특별히 상세하게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생각(念)하고
명호를 염불하며 스스로 귀의하면
곧바로 필정에 들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아미타불을 억념(憶念)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나무아미타불>을 억념하고 명호를 외울 것을 권하였습니다.
용수보살의 말씀처럼 대승의 보살행을 닦아
불퇴전에 이르는 길은 자력의 한 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보살의 길을 가려는 이들의 특성이 다르고,
이들이 제도해야 할 중생들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자력적인 수행을 통해 불퇴전에 이르는 보살도 있고,
불보살의 본원이라는 튼튼한 배에 의지하여
믿음의 길로 불퇴전에 이르려는 보살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욕망과 집착이 강한 중생에게
욕망과 집착을 모두 버리라고
무조건적인 채찍으로만 끌고 가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에 대한 불교 신앙을 통해
이들의 욕구와 갈망을 들어주며
차츰차츰 해탈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신앙의 결정판인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에 대한 감동과 믿음 속에
극락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순수한 신앙과 믿음의 열정이
어찌 이 사람에게 비불교적인 삶을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 부처님이 가신 길을 공경하며
진실되고 바른 불자의 길을 가지 않겠습니까?
5. 바른 정토 신앙인의 삶
정토 경전인 <관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 신앙인으로서
평소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삶의 고난에 처한 위제희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세 가지 복(三福)을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첫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 가지 선업(十善業)을 닦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법·승의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거동과 예의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 가지 수행을
극락 세계에 왕생하는 청정한 업이라 합니다.
그리고 부인은 아직 잘 모를 일이나,
이 세 가지 청정한 업은 과거·현재·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닦으신 청정한 업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평소에 아무렇게만 살다가
나무아미타불 10번만 염불했다고 해서 극락왕생한다고
염치없이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극락 정토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을 받아지니는 사람들은
10번의 염불만으로 극락으로 인도하겠다는
중생 구제의 서원에 대한 깊은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답게
평소의 생활 태도 또한 10선법을 닦고, 계율을 지키고,
대승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청정한 업을 닦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현생의 삶을 바르게 살아감을 통해
극락 왕생이라는 미래생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하는 신앙이
참다운 <나무아미타불> 신앙자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정토 신앙인의 삶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참으로 청정하고 진실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6. 원왕생가
<삼국유사>에는 '원왕생가'라는 향가와 함께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정토 신앙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광덕과 엄장은 신라 문무왕 때 경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에서 짚신을 삼아
처자와 함께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고,
엄장은 남악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두 친구는 나무아미타불 정토 신앙에 심취하여
열심히 열불 수행을 하고 서로 우정을 돈독히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둘은 누구든지 극락세계에 가면 먼저 알리자고
서로 약속하며 염불 수행에 정진하였습니다.
어느날, 엄장의 창밖에서
"나는 이제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문밖에 나가보니 하늘에 음악 소리가 들리고
황혼의 빛이 땅으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다음날 엄장이 광덕의 처소에 가 보니 광덕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엄정은 깊이 슬퍼하며 광덕의 처와 함께 장사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평소 광덕의 아내에 대해 마음이 있었던 엄장이
광덕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친구 광덕이가 이제 왕생하였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냐?"
이렇게 엄장이 잠자리를 같이 하려고 하자
광덕의 처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고기를 잡기 위해 나무에 오르는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엄장이 물었습니다.
"이미 광덕이 그렇게 살았는데,
어째서 나와는 안 되느냐?"
"나는 남편과 동거한지 10년이 되었지만,
일찍이 한 자리에 누워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밤이 되면 날마다 몸을 단정히 한 다음에
바르게 앉아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하고 16관을 명상했습니다.
그리고, 밝은 달이 문에 비치면 그 달빛 위에 앉아 선정에 들곤 하였습니다.
정성이 그와 같으니 어찌 왕생하지 않겠습니까?
천리길을 가려는 사람은 그 첫 걸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을 보니 동쪽으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서방의 극락정토로 가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엄장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느끼고 뉘우치고
원효 스님을 찾아가 지도를 받고 일념으로 염불하고
역시 서방 정토에 왕생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광덕이 서쪽으로 지는 달을 향해 합장하고
왕생을 염원한 노래(향가)가 원왕생가(願往生歌)입니다.
"달아
이제 서방 넘어 가시려는고
무량수불 전에 사뢰옵소서
서원이 크신 아미타불 우러러
두 손을 합장하고 왕생을 깊이 희원하며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어 주소서,
아, 이 몸을 남겨 놓고 아미타불께서는 48대원을 이루실까."
광덕과 같은 정토 신앙자의
평소의 삶과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순수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나의 이 몸을 남겨 놓고
어찌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이루실 것인가?
광덕이 얼마나 정토 신앙인으로서
열심히 염불하고 청정행을 닦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된 정토 신앙인의 자세와
평소의 삶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토 신앙이라면
자력문과 타력문의 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쉽고 어려운지,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길인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하나의 분별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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