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75 불교 인물사(6)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6) - 구원 한편, 원효 대사는 지극정성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10 번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민중들에게 극락 왕생의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에는 원효 대사의 이러한 교화에 힘입어 가난하고 무지한 민중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모두 '나무 아미타불'을 부를 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원효 대사는 화엄의 원융무애한 보살행을 지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모르는 민중들을 위해 정토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대중 불교를 펼쳐나갔습니다. 에서는 이러한 원효 대사의 보살행과 함께 정토 왕생의 실천에 대해 그의 이름 "원효(元曉)"는 본래 우리말로 '새벽"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참으로 우리 나라 불교의 새벽을 열었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1.. 2024. 3. 10. 불교 인물사(5)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5) - 무애 원효 대사는 요석 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승복을 벗어던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세속인이 되어 '소성 거사(小姓 居士)'라 자칭하며 민중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과감하게 당시 귀족 불교에 대해 인연을 끊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밑바닥 민중들과 어울렸습니다. 이러한 원효의 삶은 등의 기록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설화들로 각색되어 전설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에서는 이러한 원효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 원효는 광대처럼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자라처럼 몸을 움츠리고 곱사처럼 등을 굽히며 두 소매를 휘젓고 다리를 세 번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춤을 추면서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단번에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네 (일체무애인 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 一道出生死) ".. 2024. 3. 6. 불교 인물사(4)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4) - 파계 원효 대사는 붓을 던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에 충격을 던지는 파계를 행하게 됩니다.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로 백제와의 싸움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로 홀로 살고 있던 20대 초반의 요석 공주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어느날 원효는 미친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가 찍으련다." 태종 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원효가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하는구나.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왕은 궁리들를 보내어 원효를 모셔오게 하였다. 궁리들은 '문천교'라는 다리에서 원효를 만나 대궐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원효는 일부러 다리 가운데 떨.. 2024. 3. 2. 불교 인물사(3)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3) - 회향 원효 대사는 해골물을 마신 체험 이후 당나라로 향하던 발길을 신라로 돌렸습니다. 10년간 두차례에 걸쳐 고생하며 떠나려 했던 중국 유학의 꿈을 접은 것입니다. 서라벌로 다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렀습니다. 분황사는 현재에는 작은 절이지만, 당시에는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와 비견될 정도로 큰 사찰이었습니다. 분황사는 자장 율사를 비롯한 신라의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절입니다. 그래서, 중국 유학승이 가져온 많은 불경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원효 대사는 분황사에서 자신이 해골물의 깨달음의 체험을 기반으로 그동안 공부했던 많은 경전들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원효 대사는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먼저 여러 경전들의 핵심을 요약 정리하는 "종요(宗要)"를 지었습니다. 열반경.. 2024. 2. 29. 이전 1 ··· 15 16 17 18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