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69 불교 인물사(8)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8) - 사복과 원효 민중 속으로 뛰어든 원효 대사의 삶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와 몇가지 야사를 통한 원효 대사의 삶은 신화적으로 각색되어 전설적 형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화적으로 각색된 원효 대사의 삶을 유추해보면 원효 대사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전설을 통해 원효 대사의 삶과 당시 신라 불교계의 동향을 한번 유추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원효 대사와 사복 성자의 전설에 통해 신라 불교적 민중적 흐름과 보살승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복과 원효의 전설 사복(蛇福) 은 원효와 친구지간이었습니. 어느날 사복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복은 원효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전생에 도반으로 지냈을 때 서역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 2024. 3. 17. 불교 인물사(7)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7) - 원융 의 의 기록에 따르면, 원효 대사는 거사들과 함께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에 들어가 음악을 즐기는가 하면 광대들의 칼과 봉을 가지고 악기를 탔으며 여염집(속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산천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였으며, 쇠칼이나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바위에 불상이나 글을 새기기도 하였고, 등의 여러 불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어서 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원효 대사는 일정한 규범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존 불교계의 승려들은 원효 대사를 "미치광이 같은 말을 내밷으며 해괴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악평을 하며 파계승으로 이단시하고 비난하였습니다. ------------ 1. 이규보가 본 원효 대.. 2024. 3. 14. 불교 인물사(6)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6) - 구원 한편, 원효 대사는 지극정성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10 번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민중들에게 극락 왕생의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에는 원효 대사의 이러한 교화에 힘입어 가난하고 무지한 민중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모두 '나무 아미타불'을 부를 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원효 대사는 화엄의 원융무애한 보살행을 지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모르는 민중들을 위해 정토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대중 불교를 펼쳐나갔습니다. 에서는 이러한 원효 대사의 보살행과 함께 정토 왕생의 실천에 대해 그의 이름 "원효(元曉)"는 본래 우리말로 '새벽"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참으로 우리 나라 불교의 새벽을 열었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1.. 2024. 3. 10. 불교 인물사(5)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5) - 무애 원효 대사는 요석 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승복을 벗어던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세속인이 되어 '소성 거사(小姓 居士)'라 자칭하며 민중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과감하게 당시 귀족 불교에 대해 인연을 끊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밑바닥 민중들과 어울렸습니다. 이러한 원효의 삶은 등의 기록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설화들로 각색되어 전설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에서는 이러한 원효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 원효는 광대처럼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자라처럼 몸을 움츠리고 곱사처럼 등을 굽히며 두 소매를 휘젓고 다리를 세 번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춤을 추면서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단번에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네 (일체무애인 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 一道出生死) ".. 2024. 3. 6. 이전 1 ··· 13 14 15 16 17 18 다음